1.








“좋아해요.”




큐의 표정은 늘 그렇듯 덤덤했어. 그 때문에 헷갈린 본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큐를 훑었어.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뭘? 하고 물었어. 혼잣말인지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흐린 발음이었어. 본드는 뇌를 거치지 않고 나온 자신의 물음에 당황했지만 곧 묻길 잘 했다고 다시 생각했어. 아무리 길고 심오하게 생각해본들 묻지 않고서는 큐가 좋아하는 대상이 뭔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거든.



뭔지 모를 종이를 잔뜩 안고 있던 큐는 본드의 반응에 한숨을 푹 내쉬고는 눈을 몇 번 깜빡였어. 한숨을 따라서 어깨가 한층 내려갔고 살짝 벌어졌던 입술이 꽉 다물렸어. 못 알아듣다니 한심해 죽겠네요. 라고 큐의 온 몸이 말해주고 있었어. 본드의 눈썹이 꿈틀거렸어. 큐는 꾹 다문 입술을 옆으로 길게 늘이는 듯, 미소를 짓는 듯 표정을 바꿨어. 분명히 살짝 웃은 것 같은데 할 수 없이 다시 말해주겠다는 의도가 팍팍 묻어났어.



표정하고는.. 본드는 육성으로 낼 뻔한 말을 겨우 삼켰어. 그리고 큐가 감정이나 생각을 숨기지 못하는 스타일이라고 판단 내렸지. 얼굴에 저렇게 드러나서야 포커는 절대 못 칠 스타일이었어. 큐는 입술을 떼고 눈을 살짝 내리 깔았다가 본드를 똑바로 봤어.




“당신 말이에요. 더블 오 세븐.”




본드는 큐가 자신에게 잔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어. 이런 짧은 말도 못 알아듣나요? 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을 써가며 콕콕 쏴댈 줄 알았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건 아무래도 잔소리의 서두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큐는 아무 말도 이어놓지 않았어. 예의 뻔뻔하고 담담한 얼굴로 본드를 보고 있을 뿐이었지.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 본드는 잠깐 당황했지만 곧 시선을 마주쳐 주었어. 말없이 눈빛을 마주하던 큐가 다시 짧게 한숨 쉬었어. 한심해 죽겠는데 이렇게까지 지능이 하등하다니 한편으론 불쌍해 죽겠네요- 하고 표정이 말하는 것 같았어. 본드는 가끔 큐가 말보다는 얼굴과 몸으로 더 많은 말을 한다고 생각했어. 본드는 괜히 자신의 아이큐를 대며 그렇게 낮지 않다고 변명하고 싶어졌어.




“당신을 좋아한다고요.”


“누가?”


“당연히 제가요.”




좋아해요, 당신 말이에요, 더블 오 세븐, 당신을 좋아한다고요, 당연히 제가요. 그 말들은 모두 특유의 시를 읽는 듯한 느리고 음율있는 목소리로 전해졌어. 어쩌면 노래를 하는 것도 같았어. 여기까지 생각하던 본드는 시나 노래나 그게 그건가? 하고 조금 더 현실 도피를 해봤지만 허사였어. 빤히 쳐다보고 있던 큐의 시선에 입 안이 마르고 가슴이 쪼그라드는 듯 초조해졌어.




“그래서?”


“그래서라뇨?”


“알다시피 난 자유연애주의자고 언제 죽을지도 몰라.”


“자유연애라.. 여성이 남편감을 고를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사라진 언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그런 말을 쓰는 사람이 있긴 하네요. 나이 탓인가?”


“네 말대로 나이도 많지.”


“그래서요?”


“내가 할 말인데, 큐.”


“왜요?”


“날 좋아한다며. 난 너랑.. 그러니까, 연애 같은 건 할 생각이 없어. 아니, 딱히 네가 아니라도 말이야.”


“알아요. 당신은 그런 게 안 어울리는 거.”




큐가 눈썹을 모았어. 본드는 이젠 진짜로 그래서? 하고 묻고 싶었어. 큐의 미간에 쌓인 얇은 주름과 축 쳐진 입술이 꼭.. 세상에 이렇게 머리가 나쁠 수가, 이렇게 친절하게 말해주고 있는데 하나도 이해 못 하고 있잖아? 하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어. 본드는 괜히 부끄러워졌어. 큐는 눈을 깜빡이며 한숨을 내쉬는, 특유의 한심해 죽겠다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다시 한 번 지었어.




“그러니까 말이야. 날 네가 좋아해봤자..”


“알아요.”




뭘 다 안대? 그럼 나한테 왜 고백한 거야? 본드는 조금 헷갈렸어. 그리고 이 상황이 매우 불편하고 답답해지기 시작했어. 큐의 마음이 뭔지 왜 그러는지 이해해 주려 노력한지 삼십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야. 본드가 이 상황을 지겨워한다는 걸 눈치 챈 큐가 먼저 입을 열었어. 




“그냥 그렇다는 거예요.”




그냥 그렇다고? 큐의 말에 본드는 벙쪘어. 고백을 하고 나서 한다는 말이 그러니까 우리 연애할까요? 도 아니고 연애까지 해주진 않더라도 알아는 주세요, 도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라니.. 오히려 새로운데? 하고 생각하다가 덤덤한 큐의 얼굴을 보며 생각을 고쳐먹었어. 얘는 이게 오히려 어울리는 것 같구나, 하고 말이야. 이럴 거 왜 싱숭생숭하게 말을 꺼낸 걸까 싶었지만 상대가 큐니까 이해가 되는 것도 같았어. 그도 그럴게 매사 느긋하고 덤덤한 모습이 어딘가 보통 사람과는 달라보였거든. 나사가 풀려 보이기도 했고 말이야.



그냥 밥을 먹거나 잠을 자다 말고 날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하고 본드는 가볍게 생각했어. 내일은 또 아니었나 보다, 하고 생각하고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지. 보기보다 생각한 걸 다 입 밖으로 내는 스타일이구나.. 하고 큐를 새롭게 평가했어. 가볍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어. 본드는 트레이닝복 위로 엉덩이를 긁었어. 트레이닝실에서 호출을 받고 그대로 불려나온 탓에 복장도 그대로였고 땀도 축축했어. 땀이 식어서 끈적거리는 탓에 슬슬 온 몸이 가려워지고 있었지.




“그래, 알았어.”




그럼, 하고 본드가 먼저 돌아섰어. 얼른 다시 땀을 빼고 샤워를 할 생각에 걸음이 바빠졌어. 트레이닝실로 돌아가는 것부터 운동으로 만들기 위해 가볍게 뛰었어. 큐는 그런 본드의 뒷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어. 안고 있던 종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 옆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버렸어. 서있을 정신력도 뭣도 남아있지 않았어. 큐는 바보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귀를 혹시나 본드가 봤을까봐 걱정됐어. 양 손으로 귀를 가리며 여러번 눈을 깜빡였지. 울지 않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었어. 아무렇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듯 숨을 크게 삼켰다가 빠르게 뱉기도 했어.



차였네.



너무 성급하게 군 자신의 목을 붙잡고 흔들고 싶었어. 좀 더 부드럽게 말하고, 좀 더 상냥하게.. 머리론 여러 생각을 했지만 곱슬거리는 머리가 뻣뻣해 질 정도로 긴장했으니 자신으로선 이게 최선이었어. 다시 눈물을 참으며 눈을 깜빡이고 한숨을 내쉰 큐가 몸을 일으켰어. 차였다, 부끄러워.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느릿하게 엘리베이터로 향했어. 긴장의 여운으로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큐 자신은 몰랐지. 긴장감에 뭐라도 안고싶어 가져온 에이포 용지도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지만 그것도 몰랐어. 큐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으니까.


















2.




본드는 「전함 테메레르」 앞에 앉아 있었어. 무표정한 듯 불만스러운 듯 그림을 보고 있었지. 제임스 본드다, 생각하자 잠깐 온 몸이 언 듯 멈칫했어. 하지만 잠깐이었어. 큐는 금세 정신을 추슬렀어. 그리고 본드를 향해 경쾌하게 다가갔어.




- 안녕하세요, 더블 오 세븐. 전 당신의 새로운 쿼터마스터 퀜틴 데일이에요. 큐라고 불러도 좋지만 퀜틴 쪽이 더 즐겁겠네요.




큐는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어. 본드는 큐의 휘어진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웃었어. 어느 날 괜히 기웃거리던 트레이닝 실에서 본 얼굴이었어. 그 때 본드는 땀에 흠뻑 젖어서는 동료 현장요원과 농담을 하며 웃고 있었어. 잠깐 숨을 돌리는지 손에 쥔 텀블러와 어깨를 가볍게 흔드는게 여유로워 보였지. 큐는 그 표정을 찬찬히 되새겼어.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어. 큐는 어서 잡으라는 뜻으로 내밀었던 손을 살짝 흔들었어. 본드가 퀜틴- 하고 부드럽지 않은 자신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러주며 손을 마주 잡으려는 순간,






큐는 잠에서 깼어.











“아..”




큐는 한숨을 쉬며 느릿느릿 몸을 웅크렸어. 명치가 아파서 당장 죽을 것 같았어. 쿨럭거리며 발작적인 기침이 나왔어. 갑자기 깨버린 탓에 머리도 아팠지. 양 손으로 얼굴을 비비다가 머리를 감싸 안고 잔기침을 뱉었어. 찔끔 눈물이 나올 것 같았어. 눈물의 이유가 하필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명치를 밟고 뛰어간 고양이가 야속해서인지, 단순히 밟힌 명치가 아파서인지는 분간이 서질 않았어. 큐는 일어나려고 침대를 짚었지만 쿨럭 거리며 다시 베개에 파묻혔어. 저혈압에 취침시간까지 적은 큐에게 새벽은 쥐약이었어.




“아파..”




큐는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느적느적 베개 위를 헤매다가 한참만에야 침대를 짚고 힘겹게 일어날 수 있었어. 작은 발로 자신의 명치를 가격하고 사라진 고양이를 찾아 침대 주변을 둘렀어. 하지만 고양이는커녕, 밑에 뭐가 있는지도 보이지가 않았어. 큐는 한숨을 쉬며 안경을 찾아 쓰고는 눈을 깜빡거렸어. 방문이 열려 있었어. 다시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어. 왜 또 나간거야.. 제발.. 웅얼거리며 곁에 벗어 놓은 나이트가운을 끌어와 침대 위에서 입었어. 그리고 누가 보면 답답하다고 가슴을 칠 정도로 느릿하게 침대를 벗어났어.



큐의 파자마 바지가 바닥에 질질 끌렸어. 큐는 발뒤꿈치에 파자마가 걸릴 때마다 손을 뒤로 돌려 천을 당기며 거실로 나섰어. 팔을 꽉 모아 팔짱을 끼고 느릿하게 걷는 몸이 부들부들 떨렸어. 고양이를 찾으러 나온 거실이 너무 추웠거든. 아직 추운 날씨였지만 큐는 건조한 게 더 힘들어서 히터나 라디에이터를 잘 켜지 않았어. 대신 따듯한 나이트가운을 입고 이불 안에 핫팩을 넣고 잠들었지. 어차피 집에 오면 침대에 붙어 지내기도 했고 말이야. 그 덕에 고양이도 추운 밤엔 큐 옆에 붙어 체온을 나누며 자곤 했어.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었지. 하지만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고 어떻게 문을 여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어. 큐는 혹시나 고양이가 감기에 걸릴까 싶어서 서둘렀어. 하지만 잠이 덜 깬 새벽인 탓에 매우.. 느렸지.



느릿느릿 집을 걸어 다니던 큐는 소파 위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어. 몸집을 보아하니 레이디 디디였어. 놓칠까 싶어 얼른(큐의 기준으로) 잡았더니 디디가 싫다고 온갖 난리를 부렸어. 탓에 손등을 조금 다쳤지만 놓을 수 없었어. 나머지 한 마리인 레이디 큐큐는 어디 또 구석에 숨어든 모양이었어. 큐는 레이디 디디를 이불 안에 넣고 문을 꼭 닫았어. 그리고 큐큐를 소리 내 부르며 구석을 들쑤셨어. 풀어지는 가운을 여러 번 여며야 했지. 추위 탓에 등은 점점 더 동그랗게 움츠러들었어.






큐가 레이디 큐큐와 레이디 디디를 모두 찾아서 침대에 밀어 넣었을 땐 해가 어설프게 뜨고 있었어. 큐는 차가워진 발을 이불에 비비며 퉁명스럽게 고양이들의 엉덩이를 때렸어. 나쁜 레이디 큐큐, 나쁜 레이디 디디, 하고 서러움을 토했는데 고양이는 태평하게 자리를 잡을 뿐이었어. 큐는 성격상 더 다그치지 못했어. 그냥 고양이 두 마리를 끌어안고 멍하니 천장을 보며 누웠어.




“문은 대체 어떻게 열어? 추울 텐데 왜 나가는 거야?”




큐는 고양이 두 마리에게 호칭을 붙여가며 예의를 차려 대했어. 원래 성격이 무례하지 않은 탓이기도 했고 자신의 집에 먼저 찾아와준 고양이 두 마리가 표현할 수 없이 고마워서이기도 했어. 때문에 각각 자신의 성과 이름 제일 첫 알파벳을 딴 이름도 붙여 주었어. 쿼터마스터가 되고 큐로 불리기 시작한 후에는 큐큐, 라는 이름이 조금 거시기 해지긴 했지만 붙여 줄 땐 절대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큐는 대답해, 대답해. 하고 큐큐를 괴롭히다가 그만두고 눈을 감았어. 알람이 울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큐는 따끔거리는 눈을 감긴 했지만 잠들 수 없었어. 그러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렸어. 어지러운 도식과 해결하지 못 한 버그를 따라가던 생각은 어느새 본드에게 닿았어. 큐는 본드만 생각하면 이불을 걷어차고 싶었어. 첫 만남부터 어제 고백까지 단 한순간도 부끄럽지 않은 적이 없었어. 나는 대체 왜 이렇게 생각과 다른 짓만 하는 걸까 생각하면 우울할 지경이었어.






처음 만난 날이었어. 실제로도 본드는 「전함 테메레르」 앞에 앉아 있었어. 그의 옆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큐는 움직일 수가 없었어. 여러 번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긴장해버렸거든. 좀 전까지만 해도 긴장으로 떨리던 심장이 멎은 것처럼 아랫배를 향해 떨어지고 차가워진 손이 축축하게 젖었어. 큐는 여러 번 축였던 입술을 다시 한 번 핥았어. 본드는 그런 큐를 눈치 채지 못 했어. 큐는 아무렇게나 벌려 앉은 본드의 다리와 깍지 낀 손, 경험을 말해주는 무거운 그림자들을 차례대로 천천히 훑었어. 너무 많은 걸 눈에 담고 싶다보니 오히려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게 답답했어. 조금만 더 본드의 모습을 구경하고 다가가자, 하고 마음먹었다가 할 말을 다듬었다가 혼자 얼마나 바빴는지 몰라. 겉으로 보기엔 무표정으로 한 사람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말이야. 그 무표정이 너무 많은 표정을 담고 있어서 지어진 표정이라는 건 아무도 몰랐어.



큐는 어떤 말을 먼저 할지 골라야 했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거든. 쿼터마스터 큐가 아닌 큐브랜치의 퀜틴 데일일 때부터 큐는 본드를 알고 있었어. 알고 있다는 말보다는 그 때부터 훔쳐봤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았지만. 어쨌든 큐는 자신이 쿼터마스터가 될 줄 몰랐던 것처럼 본드와 실제로 대화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냥 훔쳐보는 게 다일 줄 알았지. 어느 때의 활약부터 칭찬해야 할까, 뭐부터 물어봐야 할까 팬 싸인회를 기다리는 소녀처럼 두근거렸어.



일단은 팬이라고 말하자.



큐는 그렇게 다짐했어. 헐리우드 스타도 아닌데 팬이라는 말을 들은 본드가 어떻게 대답할지는 미처 생각해보지도 못 했어. 그 정도로 정신이 없었지. 그렇게 벌벌 떨어가며 다가갔는데 큐가 한 말은





-저 그림은 언제나 절 멜랑콜리하게 해요.



였어. 말을 하면서 큐는 자신에게 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냐고 묻고 싶었어. 긴장한 손이 자꾸 꼼지락거렸어. 이게 아니야, 이게 아니야. 얼마나 생각했는지 몰라. 이제라도 다시 첫 인사를 하자고 몇 번 다짐했는데 긴장한 입은 아무렇게나 떠들어댔고 결국 본드가 자리를 뜨려 할 때까지 계속 됐지. 다급하게 더블 오 세븐, 하고 본드를 부를 때쯤에 큐는 울고 싶었어. 바싹 긴장해서 본드는 보지도 못 하고 헛소리만 한 자신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 생각하면 답이 안 나왔어. 본드 앞에서 파자마를 운운한 건 떠올릴 때마다 발터로 자신의 머리를 갈기고 싶었어. 더군다나 저 그렇게 어리지도 무능력하지도 않아요, 하는 의미의 말을 의도와는 다르게 본드를 무시하는 듯 해버렸으니..



꿈에서는 잘만 웃으면서 첫 인사를 하는데 왜.. 매일같이 본드에게 한 행동을 후회하고 다음날이면 또 실수하는 자신의 다리를 누가 부러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럼 입원하는 동안은 실수를 안 할 테니까. 큐는 어제의 충동적인 고백을 생각하며 빨개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어. 본드를 훔쳐보러 간 것뿐이었는데 발견당해서 결국 본드를 불러내게 되고.. 할 말이 없어서 할 말을 찾다가 던진다고 던진 말이 좋아해요, 라니..



그냥.. 정말로 그냥.. 보러갔을 뿐이었는데. 큐는 시간을 돌려서 패대기치고 싶었어. 본드를 보러 간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들뜨고 긴장되고.. 하여간 간질간질한 마음에 아무거나 잡히는 걸 끌어안고 생각 없이 트레이닝센터로 내려가던 자신을 말이야. 그래, 그걸 안고 가긴 왜 안고 갔을까. 그것도 바보 같아 보였겠지. 아무것도 없는 에이포 용지를 꼭 끌어안고 다니다니 제정신인가 싶었을 거야. 큐는 더 참담한 기분이 됐어. 이제 어떡하지? 본드를 어떻게 보지? 생각하며 큐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봤어. 죽고 싶다. 없던 일로 하고 싶어. 속으로 중얼거렸어.











그리고 그날. 잠이 모자라 새빨갛게 부르튼 눈을 하고 큐는 본드를 만났어. 하필이면 찾아가지 않았는데도 마주쳤지. 어색한 아이컨택에 속으로만 안절부절 못 하던 큐는 나오는 대로 입을 놀렸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어제 한 말은 그냥 잊어주세요, 였지만 나온 말은 달랐어.




“저 당신 안 좋아해요.”




본드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큐는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싶었어. 이제는. 하고 서둘러 덧붙여 봤는데 왠지 기분은 더 우울해졌어.



그런 큐를 보는 본드는 천재들은 약간 돌았다던데.. 하고 생각했어. 본드는 어제 좋아한다고 할 때와 똑같이 뻔뻔한 표정인 큐를 한참 보고 있었어.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할 말도 없었거든. 큐가 한숨을 쉬고 눈을 깜빡였어. 또 저 표정. 말이 없는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왜? 좀 억울했지. 자신의 쿼터마스터는 괴짜에다가 진짜 생각하는 건 뭐든 다 입 밖으로 내고 마는 성격인가 보다고 확신했어. 거 봐, 진짜 그냥 자다가 든 생각이었나 봐, 하며 피식 웃었어.




“알았어.”




본드는 어제처럼 가볍게 돌아섰어. 큐는 또 울고 싶어졌어. 

















3.





테너가 비행기 표를 가져왔어. 자기 관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본드는 의외의 전달자에게 눈썹을 찡긋 올려 보였어. 비행기 표가 왔다는 건 새 임무의 시작이란 뜻이고 그럼 새 무기도 함께라는 뜻이니까 큐가 오는 게 당연하잖아. 본드는 테너에게 네가 왜? 하고 묻듯 턱짓을 했어. 뜻을 알아들은 테너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대답했어.




“어.. 큐는 바쁜 것 같아서요.”




테너가 뒤통수를 긁었어. 본드는 고개를 저으며 짧게 한숨 쉬었어. 하는 투를 보니 둘러대고 있는 게 뻔했어. 바쁘지도 않은데 왜 네가 오냐는 말이 턱 끝까지 나왔어. 본드는 툭 뱉어버리려다가 큐도 아니고 죄 없는 테너에게 뭐하러 그러나, 하는 마음에 억지로 삼켰어. 대신 표를 꺼내 행선지와 시간을 확인했어. 출국 일은 이주 뒤였어. 본드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스케줄을 짰어. 운이 좋았어. 대부분 급하게 움직이는 편이다보니 이정도면 꽤나 충분한 준비 기간이었거든. 컨디션을 조절하고 새로 받은(저번에 받은 발터는 어디 폭발물 잔재 속의 찌꺼기가 되어있을 거야.) 무기에 적응할 시간도 완벽 할 것 같았어. 흡족해 하는 본드에게 테너가 검은색 박스를 이어서 내밀었어.




“내용물은 전이랑 같대요.”




박스엔 총 한 자루와 아주 작은 위치추적기가 들어 있었어. 아, 그거 반지나 벨트 같은 금속 악세서리에 붙일 수 있다고 전해달라고 했어요. 산산조각내서 발동시키는 건데 늘 그렇듯 대기하고 있던 요원들이 들이닥칠 거예요. 그래도 더블오 세븐, 이번엔 제발 정해진 동선에서 안 벗어나길 바랄게요. 아, 이건 제 바람이에요. 테너가 설명했어. 그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넘긴 본드는 발터를 꺼내 들었어. 그것도 늘 그렇듯 지문 인식이요. 테너가 필요 없는 말을 붙였어.



본드는 발터를 쥐고 손을 움직였어. 재빠르게 들어봤다가 곧 쏠듯 한 손을 받혀보기도 했어. 적당한 무게에 몸체디자인이며.. 그립감이 완벽했어. 처음 잡아보는 건데도 익숙한 듯 편안하게 잡혔지. 본드는 큐가 총 하나는 정말 마음에 들게 만든다고 인정했어. 마음에 드는 감촉에 발터를 여러 번 다시 쥐어봤어. 사람 자체는 모르겠지만 총 하나는.. 가만? 본드가  멈칫했어. 그립감이 좋은 게 아니라 이거 꽤.. 발터의 그립감에 기시감을 느낀 본드가 돌려가며 살폈어. 익숙한 듯 편한 게 아니라 진짜 익숙했거든.




본드가 그러거나 말거나 테너는 안부를 늘어놓고 있었어. 반대로 본드는 테너가 그러거나 말거나 조용히 생각에 빠졌지. 손에 쥔 무기도, 무기를 담아온 박스의 사이즈도 지나치게 익숙했어.



선대 큐가 이것저것 기발한 무기를 새로 개발해 챙겨주던 것에 비해 이번 큐가 건네는 무기는 늘 한결같았어. 임무에 따라 뭔가 추가될 때가 있긴 하지만 지문 인식 발터 하나와 위치 추적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거든. 같은 무기라니, 선대 큐에게 더 익숙한 본드는 이런 단촐한 무기가 허전했어. 솔직히 성의가 없어보였지. 큐가 자신이 하는 일을 제대로 알고나 있나 싶기까지 했어. 본드는 큐가 무기 개발이 아닌 다른 곳에 더 관심을 쏟고 있거나 자신의 백업 실력을 너무 과신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 크게 바쁘지 않다는 걸 보면 전자보다는 후자일 가능성이 컸지.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어. 이쪽은 목숨 내놓고 뛰어다니는데 말이야.



설마 귀찮아하는 건 아니겠지? 불만이 거기까지 닿았어. 본드는 얼굴을 확 찌푸리고 박스를 쓸었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도무지 읽을 수 없는 큐의 얼굴이 떠올랐어.



본드가 보기에 큐는 밤마다 여드름을 짤 것 같은 심드렁한 어린애였어. 어디서 마주쳐도 무표정하고 맥없어 보이는 게 일을 즐기는 것으론 절대 안 보였지. 늘 딴 생각, 혹은 여러가지 생각을 한 번에 하느라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거든. 만날 때마다 어른을 놀리는지 무시하는지 하여간 기분 나쁜 헛소리나 찍찍 하고 말이야. (저번에 당한 좋아해요, 이제 안 좋아해요, 라던가) 그러고 보면 할 일 없이 현장요원 섹션을 돌아다니는 걸 한 두 번 본 것도 아니었어. 거기엔 볼 일도 없을 텐데 돌아다니는 건 농땡이 중이라는 증거 아니겠어? 한 번 나쁘게 보기 시작하니 끝이 없었어. 본드는 큐가 책임감 없고 게으른 인간일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했어.



발터를 다시 한 번 꽉 쥐어봤어. 여전히 손에 딱 들어맞았어. 꼭 사용해 본 기종 같았지. 그게 저번 발터와 같은 모델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어. 이것 봐라? 본드의 얼굴은 이제 숨길 수 없이 굳었어.




"무슨 문제라도.."


"그 어린애는 대체 일을 하긴 하는 거야?"


"네? 무슨?"


"큐 말이야. 이쪽은 목숨을 내놓고 다니는데."




본드의 반응에 테너가 입술을 축였어. 할 말을 찾는 듯 입을 뻐끔 거렸지. 큐를 보호해주고 싶어서 말을 굴리는 게 뻔히 보였어. 본드가 으르릉 거리며 박스에 발터를 집어넣고, 탁 소릴 내며 닫았어.




"전달을 제가 한 것 때문이라면 본드, 어차피 설명이 필요한 무기도 아니어서.."


"그게 문제야."




본드의 반응에 테너는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감이 오질 않았어. 자유분방, 시키는 거 안지킴의 끝 공공칠이 원칙을 따질지는 꿈에도 몰랐어. 테너는 자신의 오지랖 때문에 큐가 욕을 먹는 것 같아서 미안했어. 사실 대신 전달 해주겠다고 나선 건 자신이었거든.



안 그럴 수가 없었어. 하필이면 출근길에 큐가 콧대를 잡고 화장실로 뛰어가는 걸 봐버렸지 뭐야. 새벽에도 한 번 쏟았는지 얼룩덜룩한 와이셔츠를 입고 세면대에 코를 박고 있는데 인간으로써 어떻게 그냥 지나치겠어. 시계를 보며 건성으로나마 등을 토닥였어. 그러면서 괜찮아? 물었는데 힐끔 고개를 든 큐의 얼굴이 생각보다 가관이었어. 견딜만해요. 하고 말했지만 전혀 안 그래 보였지. 큐의 턱에는 미처 씻어내지 못 한 코피가 묻어있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어. 설상가상 말을 하는 도중에 간신히 지혈했던 코피가 다시 터져 흘렀어. 큐가 재빠르게 와이셔츠로 받았는데 거기도 얼룩덜룩 피가 말라붙어있었어. 테너는 하필이면 그것까지 놓치지 않고 봐버렸어.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도와주겠다고 나섰어. 큐의 꼴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자신의 여분 와이셔츠까지 건네며 제발 쉬라고 권했어. 그게 괜한 오지랖이었나봐. 테너는 사실대로 말하자니 큐의 자존심을 건들 것같고 말을 안 하자니 욕 먹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았어. 테너는 끙.. 하고 신음소리를 흘렸어.








*








단거.. 단거. 큐는 며칠 내내 이어진 야근 탓에 제 정신이 아니었어. 당장 집에 돌아가서 레이디 큐큐와 디디를 끌어안고 마음껏 자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어. 모니터에 떠 있는 글자가 히브리어로 보일 지경이지.



당분이 필요해. 당분. 큐는 자신의 주식인 당분을 향해 느리게 전진했어. 오늘은 보던 중 최고로 느렸어. 원래도 빠르진 않은데 몸 상태와 비례해 더 느려졌거든. 덕에 큐브렌치 직원들은 덩달아 느긋하게 손가락을 놀렸어. 그들은 자신의 수장이 무척 여유로운 상태라고 생각했어. 늘 같은 표정으로 한껏 여유롭게 탕비실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뭐, 그럴만하기도 했어. 일주일은 더 걸릴 것 같던 더블오 세븐 요원의 백업 준비가 오늘 아침에 끝났거든. 골치 아픈 일이 끝났는데 얼마나 여유롭겠어. 실제로 큐브렌치 직원들은 당장 지시가 없어서 여유로웠어. 전날 밤을 꼬박 샌 최종 시뮬레이션 섹션만 괴로운 얼굴로 책상에 엎어져 있었지. 그들은 진짜 한 숨도 안 재울 줄은 몰랐어.. 하고 끙끙 앓았어.


여타 직원들은 여유에 젖어서 사내 메신저로 잡담을 나눴어. 사담을 누르는 손길조차 빠르지 않았어. 주 대화는 큐의 일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였어. 분명 M의 요구한 시간은 여유로웠는데 뭐가 그렇게 바쁜지 섹션별로 밤을 새게 만들더니 결국 시간을 반으로 줄였어. 왜 이렇게까지 무리하느냐, 한방에 끝내고 쉬니까 오히려 좋다 의견이 분분했어.




-그래도 그건 진짜 무섭더라. 내일 아침까지는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ㅇㅇ 내일아침까지 ㄷㄷ


-합시다, 해야합니다도 아니야. 그냥 합니다 ㅇㅇ




모두가 동의하는 부분은 저거였어. 퇴근 전까지, 라거나 최대한 빨리, 라는 말도 있는데 큐의 마감 기준은 항상 내일 아침이었어. 아침 브리핑에서 지목당한 섹션은 죽고 싶다는 표정으로 얼굴이 썩어갔지. 차라리 퇴근 전까지 어떻게든 해내라고 족치면 바빠서 한 두 개의 버그는 모르는 척 놓치고 다음날 출근해서 해결할 텐데 큐의 ‘아침까지’안에선 그럴 수 없었어. 아침이 올 때까지 꼼꼼한 재검사를 받아야 했거든.




직원들이 그간의 악몽을 떠올리는 동안 큐는 따라주지 않는 몸을 야속해 하며 탕비실로 들어갔어. 전용 머그컵에 우유 반잔을 붓고 핫초코 가루를 세 봉지 뜯어 넣었어. 달게 만들고 싶어서 가루를 많이 넣었는데 아무리 저어도 뭉친 가루가 풀리질 않았어. 큐는 그대로 컵을 전자렌지에 넣고 돌렸어. 뜨거워지면 풀리겠지. 하는 생각이었어.



완성된 핫초코를 꺼낸 큐는 아. 망했다. 하고 생각했어. 김을 내는 핫초코는 가루가 더 뭉쳐있었어. 설상가상 컵 테두리에 덕지덕지 달라붙고 끝 뿐의 가루는 왠지 모르게 부글부글 끓고 있었어. 우유가 모자라서 그런가? 큐는 우유를 추가했어. 찬 우유라 당연히 상황은 악화됐어. 이번엔 온도가 낮아서 그런거라 생각하고 한 번 더 전자랜지에 돌렸어. 이번엔 아까와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 타이머를 좀 더 길게 맞췄어.



좀 오래 돌아갔나봐. 우유 막이 터지며 펑! 소리가 크게 났어. 깜짝 놀란 큐가 그대로 굳었어. 어떡하지? 무슨 소리지? 백 번 쯤 스스로에게 물어봤어. 너무 놀라서 열어보지도 못 하다가 겨우 전자렌지를 열었어. 안에는 알 수 없는 게 들어있었어. 분명히 우유를 추가해서 가득 부었는데 양이 줄어들고 전자랜지 벽에 초코가루와 우유가 흘러내리고 있었어. 눈을 굴리며 상황판단을 한 큐는 그냥 마시기로 했어. 또 뭔갈 잘못한 모양이지, 라고 대충 생각했어. 우유를 마시는지 핫초코 가루를 씹는 건지 분간이 안 가는 맛이었어. 이상한 탄맛도 느껴졌지만 다시 시도하기에는 좀 무서웠어. 또 펑 소리가 난다면 직원들에게도 미안하고 말이야. 어쨌거나 달긴 하니까. 수긍한 큐는 설탕을 위에 쏟아 붇고 천천히 저으며 자리로 돌아갔어.








*








큐가 주는 무기를 불안해하는 본드에게 테너는, 그렇게 못 믿어서 백업은 어떻게 맡깁니까? 하고 물었어. 본드는 테너의 조언을 듣기로 했어. 서로에게 신뢰가 없는 게 문제라는 걸 그 순간 깨달았거든.








*








큐는 괴로운 머리를 손날로 꾹꾹 눌렀어. 더블오 세븐의 새 임무 지시가 내려오고 나서부터 매일 밤을 새다시피 했으니 벌써 며칠 짼지 모르겠어. 직원들은 필요한 섹션만 돌아가면서 야근을 하면 됐지만 수장인 큐는 필요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 게다가 본드와 관련된 일이니 힘이 빡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 내내 긴장해 있다가 오늘 아침 업그레이드 시킨 발터의 데이터로 현장 시뮬레이션까지 돌리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어. 테너에게 대신 전해달라며 박스를 전달할 때까지만 해도 정신이 또릿했는데 지금은 단걸 마셨는데도 구역질이 나고 눈이 감겼어. 긴장이 완전히 풀려서 주체할 수 없는 모양이야.



M이 제시한 시간은 다음 주까지였어. 필요한 백업 시스템과 무기를 구축하고 보안할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큐는 그 시간을 다 쓸 수 없었어. 본드에게 넉넉한 워밍업 시간을 주고 싶었거든. 더블오 요원들은 급하게 맡게 되는 일이 더 많다보니 자신의 컨디션은 조절하지도 못 하고 현장에 나가게 되는 일이 잦았어. 본드도 마찬가지였지. 그러다보니 혹시 무리가 올까봐 큐는 늘 전전긍긍이었어. 나이도 많은데.. (큐는 이 대목을 떠올리며 코를 좀 찡긋거렸어.) 그래서 이렇게 계획이 짜여있는 임무에서라도 몸을 최상으로 유지할 시간을 주고 싶었어. 큐가 계산하기에 본드가 몸이나 정신적으로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고 유지하기엔 일주일 이상이 필요했거든. 그럴 리 없도록 끊임없이 확인했지만 새 발터에 대한 혹시 모를 하자에 피드백을 받을 시간도 필요했고. 그래서 직원들의 목을 잡고 흔드는 심정으로 서두른 거였어. 결론은 자신이 죽어나가게 생겼지만 본드니까 뭐.. 괜찮았어.



도저히 참지 못 한 큐가 느릿느릿 일어나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어. 평소에는 같이 일하는 처진데요, 뭐. 하며 직원들과 한 공간에서 일 했거든. 물론 직원들은 제발 큐가 사무실에 틀어박혀 일해주길 바라고 있는데 말은 못 했지.



큐는 마음 같아서는 등을 웅크리고 온 몸을 돌돌 말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있어서 그렇게 못 했어. 휘청휘청 쓰러질 것 같은 다리를 겨우 추슬렀어. 아.. 발터 재질. 큐는 자신이 내리 밤을 새게 만든 주원인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 쉬었어. 이번 동선을 보건데 본드가 발터를 사람 쏘는 용으로만 쓸 것 같진 않았거든. 성격 급한 본드가 자신이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도 전에 발터로 문손잡이를 갈겨버리거나 몸채로 내리치고 달릴 가능성이 농후했어. 물론 그 전에도 늘 그래왔는데 이번엔 더 할 것 같다는 뜻이었어.



그 탓에 총알도 몸체도 절대 우그러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는 재질을 찾아 새로 만들어야 했어. 그러면서도 저번 발터와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고 싶어서 고생을 꽤 했지. 특히 방아쇠랑 그립부분이나 발사 충격은 부분은 포기할 수가 없었어. 딱딱한 걸 부드러웠던 전 모델처럼 세세하게 재연하려니 머리가 부서지는 것 같았어. 무기가 달라지면 본드가 따로 시간을 들여서 적응해야 할텐데 그 시간을 최대한 줄여주고 싶었거든. 큐는 본드가 그 시간에 컨디션을 조절을 더 하길 바랐어.



오지랖은.. 큐는 스스로를 탓하며 사무실 소파에 쓰러졌어. 또 코가 찡찡한게 조짐이 이상했어. 이러다 피가 모자라서 쓰러질 것 같다고 생각하며 몸을 동그랗게 말았어. 그래도 다행이다.. 제 때 줬어.. 머리가 푹신한 곳에 닿자마자 잠들어가면서도 베실베실 웃었어.



















4.

 

 

 


큐는 살해당했어. 원인은 독극물. 사인은 독극물 중독으로 인한 탈수. 머리맡에 있는 놓인 컵을 보니 분명해. 척 봐도 기분 나쁜 건더기가 떠있는 새까만 걸 잘도 의심 없이 마셨어. 애써 친해져 보려고 했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었군.

 


본드는 큐의 사무실 문가에서 생각을 이었어. 얼마간 그러다가 곧 깊은 한숨을 쉬었어. 내가 지금 뭘 하고 놀고 있는 건지.. 헛생각을 정리하고 진짜 죽은 것 같이 잠들어 있는 큐에게 다가갔어. 테너의 권유로 사온 케이크는 깨끗한 책상 위에 올려뒀어. 아무것도 없는 책상이 꽤나 눈에 거슬렸지. 이거 참, 살판 나셨구만. 이죽거림이 절로 나왔어. 근무시간에 이렇게 팔자 좋게 자고 있는 큐브랜치 수장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 여럿의, 어쩌면 영국 전체의 목숨을 어깨에 얹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어. 하긴, 그런 걸 느끼기엔 너무 어리긴 하지. 자기가 파자마를 입고 모닝티를 다 마시기도 전에 세상을 위협 할 수 있다느니 뭐라느니 나불대지만 역시 어렸어. 테너에게 좋은 말만 듬뿍 들었던 터라 좋게 생각해주려 했는데 이 꼴을 보니 택도 없었어. 이게 어디가 성실하고 수줍음 많은 보기 드물게 건실한 청년이야. 책상 의자에 앉은 흔적도 없이 깨끗한데. 이건 뭐 테너가 큐에게 홀렸거나 큐가 호박씨를 까대는 게 분명했어. 적어도 그런 인간은 아닌 줄 알았는데 적잖이 실망이었어.

 


그나저나 정말 잘 자는군. 본드가 바로 옆까지 다가갔는데도 큐는 미동이 없었어. 혹시 진짜 죽은 건 아닌가 싶을 정도라 본드는 큐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어. 낑낑, 작은 동물같은 잠꼬대 소리가 들렸어. 아주 숙면이네. 본드는 가져온 발터를 꺼내 다시 잡아봤어. 역시 익숙한 감각이었어. 현장에 나가는 요원에겐 이전 모델의 총을 그대로 던져놓고 뭐가 피곤해서 푹 주무신다? 젊은 혈기에 과음이라도 하셨나보지.

 


언제까지 자나 보자는 심정 반, 지도 인간이면 일어나서 양심에 찔리겠지 라는 못된 생각 반으로 본드는 맞은 편 소파에 앉았어. 발터를 넣은 박스는 티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밀었어. 등을 감싸는 고급 소파의 쿠션이 아늑했어. 이건 아예 자겠다고 산 것 같군. 생각 할수록 마음에 안 들었어. 본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리를 올리고 누웠어.

 

 

 

 

 

 

한 편, 그 순간 큐는 꿈을 꾸고 있었어. 며칠간 제대로 눕질 못해 부어버린 다리와 오랜 긴장에서 오는 근육통으로 잠결에도 끙끙 앓았어. 심지어 꿈자리도 사나웠어. 요 며칠 너무 매달린 탓인지 꿈에서도 일이었거든.

 

 

 

-쿼터마스터. 차라리 떠블오세븐한테 망치를 하나 주는 게 어때요?

 

 

 

어, 나 이 말 꿈에서 들은 것 같은데.. 큐는 꿈에서 데자뷰를 느꼈어.

 

 

 

-안돼요. 번거로우면 움직임이 둔해져요.

 

-저도 진심은 아니었지만 냉정하네요. 그래도 어떡해요. 당신이 찾는 재질은 이 세상에 없는 거라니까요?

 

-그럼 합성이라도 해봐요.

 

-제발.. 당장 새로운 금속을 만들어내라니.. 우린 신이 아니란 말이에요.

 

-힘내요. 할 수 있을 거예요. 국가가 당신들을 믿고 있어요. 그래도 문제점 보안은 미리 해놨으니까 다행이잖아요.

 

-차라리 돌을 녹여오라고 해요.

 

-안돼요. 무거워요. 전 기종이랑 무게를 맞추자고 했잖아요. 조금만 더 신경쓰면 괜찮은 물질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큐는 진심으로 상대를 다독이며 손을 꼭 잡았어. 그에 반해 직원들의 표정은 썩었지만. 왜 그런지는 꿈에서도 몰랐어. 아.. 다리 아파. 혈액순환이 안 되나? 근데 나 이 파트 끝내지 않았나? 왜 아직 내가 이 파트를 지위하고 있지? 맙소사 오늘 며칠이야 미치겠네! 꿈속의 큐는 마음이 급해져서 푸닥거렸어. 본드한테.. 본드한테 컨디션 조절할 시간을 줘야해 제발 이 거북이 같은 팀원들아 정신 차려. 본드가 다쳐서 오면 책임 질 거야?

 


꿈속의 팀원들은 총구에서 안개를 발사하거나 스파이더맨처럼 벽을 탈 수 있는 시계 같은 쓸모없는 걸 만들어내고 있었어. 폭발한 큐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 질렀어. 그 장난감은 다 뭐야! 그딴 거 없어도 본드한텐 충분해! 귀찮은 거 만들지 마! 큐는 꿈에서도 쉿쉿 거리며 사정없이 돌아다녔어. 다리가 점점 더 납덩어리처럼 무거워졌어. 다리가 너무 아파서 울먹이면서도 잔소리를 멈추지 않던 큐는 발터의 새 재질을 찾던 직원이 공업용 망치를 총 그립에 둘둘 말아온 대목에서

 

 

 

 

 

잠에서 깼어.

 


본드가 제대로 달릴 수 있도록 가장 심플하고 완벽한 무기를 주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아무도 몰라주는 게 서러워서 눈물이 찔끔 난 순간이었지.

 

 

 

"아.."

 

 

 

큐는 피로에 지친 몸을 움직이지 못 하고 눈만 몽롱하게 깜빡였어. 눈가가 젖어서 간질거리는 느낌이 괴로웠지. 비비고 싶었지만 도무지 손이 움직이질 않았어. 머리로 다리도 너무 무거워서 이러다 소파를 통과해 바닥에 내팽개쳐질 것 같았어. 저혈압답게 잠에서 깬 머리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 했어. 그나저나 다리가 끊어질 것 같아. 피가 안 통하나? 이러다 끊어지는 건 아니겠지.. 머릿속으론 온갖 유치한 걱정이 떠다녔지만 늘 그렇듯 얼굴엔 티가 안 났어. 눈썹이 살짝 모여들었을 뿐이었지.

 


본드는 그런 큐를 빤히 보고 있었어. 낑낑거리는 소리가 커진다 싶더니 뒤척이지도 않고 눈을 뜨던 것까지 다 지켜봤어. 저렇게 안 움직이면 몸이 저리지 않나? 생각하며 큐가 자신을 발견하길 기다렸어. 하지만 큐는 부팅 시간이 긴 편이었어. 멍청하게 천장만 올려보는데 발견당하길 기다리다간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어.

 

 

 

“굿모닝, 큐.”

 

 

 

본드는 결국 먼저 말을 걸었어. 이죽거림을 한껏 담은 목소리였어. 큐는 갑자기 들려오는 본드의 목소리에 속이 툭 떨어지는 느낌이었어. 몽롱한 머리가 본드의 목소리 톤이 싸늘하다는 건 해석하지 못 했어. 다만 내가 꿈을 꾸나 생각하며 눈을 깜빡였어. 고개를 돌리고 싶었는데 몸은 여전히 느릿느릿 따라주질 않았어. 본드는 저게 얼마나 숙면을 했으면 정신을 못 차리나 싶어서 점점 더 기분이 안 좋아졌지. 몸을 돌려 큐를 빤히 쳐다봤어. 큐가 느릿느릿 여유롭게, 큐의 입장에서는 겨우겨우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어. 눈이 마주친 본드가 눈썹을 추켜올리며 인사했어.

 


큐는 그대로 얼었어. 맞은편 소파에 모로 누운 본드가 자신을 보고 있었어. 큐는 몸의 감각이 깨어나 점점 사지가 저릿저릿해지는 걸 느끼며 멍하니 상대를 쳐다봤어. 꿈? 현실? 분간이 되진 않는데 잠에서 깨자마자 보이는 본드라니.. 어쨌든 황홀했어. 게다가 굿모닝이라고? 이거 꼭 부부같다고 생각했지. 말했지만 아직까지 정신이 멍했거든.

 

 

 

“어제 술이 과했나봐?”

 

 

 

본드가 이죽거렸어. 큐는 파악하지 못하고 살짝 웃었어. 이거 진짜 부부 같아, 이럴 리가 없는데, 생각했지. 꿈과 현실의 중간쯤에 있는 것 같았어. 큐는 저린 몸을 돌려 본드를 마주 봤어. 조금만 움직였는데도 온 몸이 쑤셨어. 몸살이 날 것 같긴 한데 그건 그거고 본드는 오늘도 여전히 황홀하게 생겼다, 고 상황 파악 못 하고 감탄했어.

 

 

 

“걱정해 주는 건가요, 더블오 세븐?”

 

 

 

큐가 가득 잠겨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어. 본드는 기가 찼어. 빈정거리는 건가? 세상 살면서 너같이 뻔뻔한 놈은 처음 본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그러거나 말거나, 큐는 행복했어. 정오가 지나 노란빛으로 변해가는 햇살이 가득 사무실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눈을 뜨자마자 본드가 있었어. 눈 뜨자마자 보이는 짝사랑 상대라니. 게다가 똑같은 포즈로 마주보고 누워서 주고받는 대화는 나긋했어. 자신의 가라앉은 목소리를 따라 낮아지는 본드의 숨소리가 들렸어. 사무실 문이 닫혀 있어서 본드의 숨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부드러운 적막이 고마웠어. 큐는 파란 눈과 따끈한 햇빛에 자신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어. 이렇게 녹는다면 녹아서 수증기로 날아가도 좋을 것 같았어. 이렇게 행복한 공간이라니.. 이제부터 좀 미안해도 사무실에서 일 해야겠다. 큐가 생각했지. 어떡해, 꿈인가봐. 큐는 아무도 자신을 깨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랐어. 나른한 기분에 끙.. 하고 앓는 소릴 내며 큐가 다시 눈을 감았어.

 

 

 

“이제 그만 일어나. 지금까지 푹 자던데.”

 

“지켜보고 있었어요?”

 

“당연하지.”

 

 

 

큐는 슬슬 정신이 들어가는 걸 느꼈어. 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지. 온 몸이 참을 수 없이 저리기도 했고 말이야. 나른하게 감았던 눈을 뜨지 않고 큐가 본드- 하고 불렀어. 코드명이 아닌 부름은 처음이었어. 큐는 그 부름만으로도 속이 뜨끈해지고 얼굴이 달아올랐어.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자신의 심장소리가 들렸어.

 

 

물론 본드는 큐가 호칭을 달리 불렀다는 것 따위 알아차리지 못 했어. 다만 벌떡 일어나서 변명은 못 할망정 소파에 볼을 부비고 있는 큐에게 기가 차고 또 찼어. 저 새끼가 미쳤나, 생각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어.

 

 

 

“왜.”

 

“꽤 간지러운 상황이네요.”

 

 

 

정신이 돌아오자 제일 먼저 든 감정은 부끄러움이었어. 큐는 자는 모습을 보였다는 부끄러움과, 본드라는 부름에 대답을 들은 것에 대한 수줍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눈을 떴어. 확인하듯 눈을 깜빡여 본드를 보고 몸을 일으켰어. 누워있는 얼굴이 예뻐 보이진 않을 것 같았거든. 몸이 저려서 어쩔 줄을 모르고 끙, 웅크렸지만. 소파에 묻혀놓은 온기가 사라지니 몸이 시렸어. 진짜 몸살인가보다, 생각하며 안경을 확인했어. 혹시 다크써클이 못나보이진 않을까 걱정됐거든. 안 벗고 자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쳐 쓰고 본드를 봤어.


 

그러고 보면 이렇게 단 둘이 어떤 막힌 공간에 있는 건 처음이었어. 전에 충동적으로 고백한 곳도 한적할 뿐, 트레이닝실 앞 복도였으니까. 자연스럽게 긴장됐고 가슴은 떨렸어. 큐는 그런 감정들을 컨트롤 하지 못 해서 오히려 표정을 굳혔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본드를 보며 소녀처럼 떨었어.

 

 

 

본드는 표정을 굳힌 큐를 보고 할 말을 잃었어. 지가 왜 저렇게 표정을 굳히나 싶었거든. 잘못해 놓고 되레 기분 나빠하고 빈정거리는데 이래서 젊은 패기가 싫었어.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걸 전혀 모르고 까불곤 하거든. 부서가 달라서 와 닿진 않지만 따지고 보면 상관이라고 짬을 부리나 싶기도 하고 날 무시하나 싶기도 하고 이런저런 별 생각이 다 들었어. 하여간 마음에 안 든다는 건 확실했어.


 

큐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마른세수를 하고 찔끔 돋았던 눈물을 닦았어. 찌뿌둥하고 저린 몸은 기지개를 피면 좀 나아지겠지만 스트레칭은 쥐약인데다 절대 싫으니 더 꽁꽁 웅크렸어. 본드 앞이기도 하고 말이야.


 

본드는 니가 그렇게 뻔뻔하게 무시하는 투로 나오겠다면 못 하게 만들어주겠단 생각에 이를 갈았어. 저 모든 게 다 괜찮아요, 뭐가 문제에요, 하는 무표정을 철저하게 망가트려 주겠다고 다짐했지.

 

 

 

“그나저나 무슨 일인가요? 새 발터는 받으셨어요?”

 

“그거 때문에 말이야. 그립감이 좋더군. 꼭 쓰던 것처럼 손에 익어.”

 

 

 

본드는 있는 대로 빈정거린 거였지만 큐는 그 말에 기뻤어. 그럼요, 그거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부끄럽기도 하고 나서는 것 같아서 말을 아꼈어.

 

 

 

“그래요? 잘 됐네요. 적응 시간이 줄어들 테니까.”

 

 

 

엄청 노력한 결과였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는 듯 받아쳤어. 머릿 속에선 연신 빵빠래가 터졌어. 본드는 눈치 채지 못 했지만 자신이 지금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에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지. 속으로는 다행이야, 보람이 있어 등등의 생각에 기분이 들떠서 발가락이 다 꼼지락거렸어.

 


반면 본드는 아주, 진짜, 아오, 저걸 진짜. 하는 기분이었어. 치면 죽을 것 같아서 한 대 치지도 못 하고 저 뻔뻔한 새끼를 어떡하지? 속이 부글거렸어.

 

 

 

“그런데 말이야, 전 기종이 너무 가벼워서 좀 별로였거든. 좀 더 무겁게 수정해 주겠어?”

 

“무겁게요? 가벼워야 들고 다니기가 편할 텐데.”

 

“크기도 너무 작고 가벼워서 조준할 때 오히려 흔들려.”

 

 

 

큐는 좀 울고 싶었어. 그거 가볍고 작게 만들려고 제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아세요? 하고 말하고 싶었는데 사용하는 본드가 그렇다니 할 말이 없었지. 지금까지 며칠 밤을 샜는데 그게 다 진짜 오지랖이라니.. 울 것 같았지만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어. 큐가 입술을 움찔거리며 아랫입술을 살짝 씹는 걸 보고 본드는 좀 통쾌했어.

 

 

 

“그리고 안 만든다곤 했지만 역시 폭발물이 좀 필요한데. 숨겨갈 수 있는 걸로. 치약이나 팬 같은 거 있잖아.”

 

“이번 임무에선 폭발물을 쓸 일이 없을 텐데요. 칸으로 잘게 나눠진 고건물이라 오히려 위험해요.”

 

“마음의 위안이라는 게 있잖아. 그리고 잘게 나눠져 있다니 문을 망가트릴 수 있는 것도 있었으면 해.”

 

“그 문제는 지금 전달한 발터로 충분할 거예요, 더블오 세븐.”

 

 

 

그래서 지금 그거 때문에 내가 밤을 새며 고생을 한 거라니까? 큐는 눈물이 나오려는 걸 큰 한숨으로 밀어 넣었어. 본드는 큐의 한숨이 통쾌하면서도 지금 니가 한숨을 쉬어? 하는 마음에 기분이 더 나빠졌어.

 

 

 

“아예 해머가 있으면 좋겠는데.”

 

“이것저것 달고 다니면 번거롭지 않겠어요?”

 

“아니, 전혀.”

 

 

 

큐는 그래서는 달릴 때 속도가 늦어지지 않겠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어. 본드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생각했거든. 큐는 본드의 실력과 판단을 전적으로 믿었으니까. 억울한 건 그냥.. 괜히 밤 샜다는 것 정도였지. 그리고 본드가 전 임무를 끝내고 오자마자 보안해뒀던 발터의 재질을 상황에 맞게 재조립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새로, 그것도 아예 다른 방향으로 만들어야 하는 무기들 때문에 눈앞에 깜깜해졌어. 지금 이 순간 레이디 디디와 큐큐가 너무 필요했어. 뭐라도 따듯한 체온을 안고 자신의 헛짓을 위로받고 싶었어. 본드를 위한 노력이 물거품이 되니 알 수 없는 서러움과 외로움이 가득 밀려왔어. 그 노력 사이에는 본드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도 은근히 들어가있었고 말이야.

 

 

 

“삼일 후 아침까지 준비해 드릴게요.”

 

“좋아.”

 

 

 

큐는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어. 지금 울상을 지으면 본드가 미안 할 테니까. 당연한 권리를 부리는 본드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순 없었어. 그런 마음이었는데 본드는 그 표정 때문에 도리어 짜증이 났어. 큐의 무표정이 그래, 어째도 상관없어, 흥. 정도로 보였거든. 어째도 그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얼마나 밉상인지 몰라. 상한 속을 달래느라 괜히 발터 박스를 만지고 있는 큐의 머리꼭지를 노려본 본드가 인사도 없이 일어났어. 큐가 인사를 하려 따라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가 풀려서 일어나지도 못 했어. 빠르게 나가버리는 본드의 뒷모습을 보며 큐는 얼굴을 양 손으로 가렸어.

 

 

 

 

 

 

 

 


*

 

 

 

 

 

 

 


결국 본드는 경량 망치(큐가 직원들을 볶아서 찾아낸 발터 재질)와 폭발하는 넥타이핀, 큐가 신경 써서 보안한 발터, 새로 크고 무겁게 만든 발터를 받아갔어.

 


그리고 추격전 시작과 동시에 망치와 두 번째 발터를 팽개쳤어. 문손잡이를 총신으로 아무리 갖다 박아도 왠지 발터가 멀쩡했거든. 총알 한방에도 문이 척척 열리고 말이야. 역시 고건물이라고 생각하며 신나게 뛰었어. 그리고 복귀하는 헬리콥터 밖으로 들고 있던 발터를 집어 던졌어. 큐의 회심작인 발터는 퐁 소리도 없이 바다에 처박혔어. 큐를 엿 먹이고 싶었거든. 뭐, 꽤 잘 만들어져서 아쉽긴 하지만 다음에도 똑같은 걸 받을 테니까 상관없었어.

 

 

 

 

 


드물게 멀쩡하게 반납한 넥타이핀 폭탄은 큐브랜치 직원 잭이 받았어. 큐는? 이라고 묻자 그는 큐브랜치 한 켠에 나눠진 사무실을 가리켰어. 또.. 본드는 작게 욕을 했지.

 


큐는 반 탈수 상태로 링거를 꽂고 잠들어 있었어. 본드가 안전하게 탈출한걸 보자마자 코피를 쏟으며 혼절해 버렸거든.

 

 

 

 

 

 

 

 

 

 

 

 

 







5.






 

본드가 아닌 다른 공공요원의 백업을 마친 큐는 길게 한숨을 내 쉬었어. 무사히 탈출해 대기하고 있던 경비행기에 올라타는 걸 보고나서야 통신을 끊었어. 사실은 끊는다고 말을 하고 비행기가 일정한 고도를 오를 때까지 지켜봤지. 요원이 안정괘도에 들었다는 걸 확인하자 온 몸에 힘이 풀렸어. 내내 긴장해서 키보드를 두들겨댔더니 다리가 후들거렸지. 이제 복귀 보고와 무기 회수만 남아 있었어. 현장 요원을 백업할 때는 긴장감에 제대로 앉지도 먹지도 못 하니까 머리가 팽팽 돌았어. 큐의 상태를 알아챈 큐브랜치 직원이 푹신한 의자를 굴려 줬어. 고마워요, 작게 말하며 넘어지듯 기대앉았어. 자리에 앉고 나서야 머리에 뭉쳐있던 피가 싹, 소리를 내며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어. 몽롱한 두통이 이는 이마를 꾹 누르던 큐는 본드, 본드가 보고 싶었어. 큐는 안경을 벗고 뜨끈한 이마와 눈을 손바닥으로 여러 번 문질렀어.

 

 

비록 현장에 있진 않지만 함께하는 일인 만큼 큐도 그만큼의 스트레스와 아드레날린을 같이 맛봤어. 일이 끝나니 시원하고 허전했지. 이 묘한 기분을 즐기고 싶기도, 얼른 떨쳐내고 싶기도 했어. 마찬가지로 긴장했던 큐브랜치 직원들도 각자의 의자에 뻗어서 한숨을 뱉어댔어. 쉿, 하는 욕과 하느님을 찾는 소리들이 섞여들었어. 그리고 곧 큐 브랜치 전체가 잠잠해졌어. 다들 각자의 휴식으로 피로감을 해소하고 있었지. 큐는 이 묘한 침묵을 즐겼어.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큐는 깜빡 잠이 들었다 깼어. 팀원들이 밥이든 술이든 먹자고 떠드는 소리에 깬거였지. 큐는 몽롱한 고개를 들었어. 정말 잠깐이었는데 깊게 잠들었던지 긴장이 좀 풀린 것 같았어. 열이 오르는지 좀 울렁이긴 했지만 심한 정도는 아니었고. 큐는 울렁이는 눈앞을 다스리며 이마를 톡톡 두드렸어.

 

 

 

“쿼터마스터, 맥주에 양꼬치를 먹을까 하는데 같이 갈래요? 멜린이 차이나타운에서 괜찮은 집을 발견했대요.”

 

“글쎄요.. 맥주는 좋지만 다들 아직 퇴근 시간이 멀었다는 걸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새 보안망 기획서는 다들 썼어요?”

 

“아직 기한 남았잖아요.”

 

 

 

신나서 떠들던 잭은 큐의 단호박을 먹고 입을 꾹 다물었어. 얼마 안 가 다시 밝아져서는 그럼 일단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허기를 채우자고 떠들었지. 어차피 큐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거든.

 

 

 

“쿼터마스터, 샌드위치는요? 참치? 고기?”

 

“고기..”

 

“그럼 쿼터마스터는 비프샌드위치로.”

 

 

 

큐는 갑자기 묻는 말에 맹하게 대답했어. 그러고 보니 꽤 오랜 시간 굶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납작한 배를 문질렀어. 어느새 다시 시끌시끌해졌어. 큐는 머리가 울려서 자기도 모르게 의자 위에서 웅크렸어. 제 정신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어. 이렇게 나약하고 애 같은 습관은 최대한 숨기고 싶었거든. 큐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기침을 했어. 콜록콜록거리는 기침이 계속 나오는 게 긴장감에 잊고 있던 감기기운이 올라오는 모양이었어. 원래 일 하나를 끝내면 그 일의 무게만큼 앓곤 했어. 이번엔 감기구나..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옷을 추슬렀어. 입이 까끌해서 샌드위치는 별로 끌리지 않았지만 신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어. 의자 위에서 오한이 드는 몸을 떨던 큐가 느리게 일어났어.

 

 

 

“제 권한이 거기까진 안 돼서 조기 퇴근은 못 시켜 주지만 회포의 알코올 정도는 눈감아 줄게요. 대신 냄새는 꼭 빼고 가세요. 아, 그리고 퇴근카드 꼭 제때 찍어요.”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간 큐가 팀원들을 집중시키고 말했어. 회식용 카드까지 꺼내놓자 브랜치는 더 들썩거렸어. 큐는 자신을 찬양하며 호들갑을 떠는 소리에 얼굴을 붉혔어. 고개를 숙이고 손을 어디 둘지 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큐를 보며 브랜치 직원들이 웃었어. 저럴 땐 꽤 귀여웠어. 가끔 불시에 뭔가를 물어보거나 칭찬을 해주면 수장인 주제에 저렇게 애같이 수줍어하고 어리바리 구는 게 어찌나 귀여운지..

 

 

물론 처음부터 귀여워했던 건 아니야. 워낙 표정변화가 적어서 저게 수줍어하는 중이란 것도 최근에 알았거든. 전엔 저러는 게 시끄러워서 빡친 걸 참는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얼굴이 달아올라서 숨기고 있던 거였어. 그걸 깨달았을 때의 충격과 귀여움이란.. 그 외에도 살 부대끼며 지내다보니 조금씩 파악하게 된 귀여움이 터질 때마다 여자 직원들은 모성애에 불탔고 남자 직원들은 막내 동생을 보는 듯한 묘한 책임감에 불탔어. 다들 큐보단 누나, 형들이었으니까.

 

 

카드를 건넨 큐는 사무실로 조용히 들어와 언젠가 본드가 누워있던 소파에 웅크려 누웠어. 체취가 남아있을 리가 없는데 쿠션에 얼굴을 비비며 헤헤하고 웃었어. 그래, 이것도 큐브랜치 공식 귀여운 장면이었어. 웃음소리가 헤헤라니.. 헤헤보다는 헿헿인가, 엫엫인가 하고 저들끼리 메신저를 주고받은 적도 있었어.

 

 

본드가 여기 누워서 날 보고.. 큐는 가만히 그 때를 회상했어. 유난히 부드럽게 느껴지던 햇살의 감촉까지 기억했지. 그 이후로 사무실에서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혼자 있는 게 적막하기도 하고 미안해서 아직 밖에서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틈이 나면 가끔 이렇게 있었어. 너무 굶어서 고픈지도 모르겠는 배에 양 손을 올리고 가만히 천장을 보던 큐가 몸을 일으켰어. 본드를 보러 가야겠어. 생각하자마자 맥주 종류를 정하고 있는 큐브랜치를 조용히 빠져 나갔어. 워낙 조용조용 움직이는 탓에 큐가 빠져나갔다는 걸 모르고 신난 직원들이 개인 사무실에 들이닥쳤다가 당황한 건 조금 더 나중에 일이었지.

 



 

 

큐는 으슬거리는 몸을 느리게느리게 이끌고 현장요원 섹션으로 향했어. 일도 없으니 이 시간이면 트레이닝실에 있겠지.. 하고 본드의 소재를 생각하기만 했는데 벌써 두근거렸어. 땀에 젖은 목덜미가 진짜 최고 예뻐, 라고 혼자 생각했다가 자신의 변태적인 생각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푹 숙였지. 미쳤나봐, 난 변태야. 하고 구불거리는 머리를 꽉 쥐었다가 쓸어 넘겼어. 아직까지 여자고 남자고 연애 경험이 전무한 큐에겐 상대의 몸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무례하게 느껴졌거든.

 

 

큐는 트레이닝실에서 제일 가까운 화장실에서 몰골을 정리했어. 이렇게 푸석푸석하다니 절대 안 들키고 보고만 와야겠다고 다짐도 했어. 무표정을 단단히 점검한 큐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복도를 걸어갔어. 전처럼 훔쳐보는 걸 들켜서 본드를 호출하게 되면 큰일이니까 최대한 관심 없는 듯 걸어가면서도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열심히 살폈어. 누군가 사정을 알면 아무리 짝사랑이라지만 그렇게 초단위로 스치듯 보는 걸로 괜찮냐고 물을 정도로 소심한 행동이었어.

 

 

 

 

 




본드는 잠깐 휴식시간을 보내고 트레이닝실로 돌아가는 길이었어. 그 길에 익숙하고 얄미운 뒷모습을 발견했지. 저게 또 할 일 없이 돌아다니네, 큐브랜치는 대체 요즘 뭘 하고 월급을 받아가는 거야? 본드는 소리를 죽여 큐에게 다가갔어.

 

 

그동안 본드는 갖가지 방법으로 큐를 괴롭혔어. 처음엔 일부러 무기에 대해 잔소리를 하거나 버리고 오는 식으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백업을 듣지 않고 날뛰는 걸로 번지고, 네 백업이 잘못된 탓에 내가 다쳤다는 둥 이상한 트집으로 넘어갔어. 큐가 의외로 잘 속아서 말문이 막히거나 끙끙거리는 게 생각보다 재밌어서 언제부터는 인이어로 상황극을 하는 지경까지 갔지 뭐야. 그게 이어지다보니 이젠 유치한 방법으로까지 뻗어 나갔어. 지금은 괴롭히는 것 자체에 재미가 좀 들려 있었지. 무슨 장난을 쳐도 한숨을 푹푹 쉬어대고 어깨를 축 늘리는 게.. 왜 귀엽지? 왜 귀여운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좀 귀엽기도 했고 따박따박 받아칠 것 같은데 의외로 그러지 않는 부분에서 우월감을 느꼈거든.

 

 

본드는 집중해서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는 큐 뒤로 바싹 붙었어. 암만 본드가 현장요원이라지만 이까지 다가갔으면 알아챌 만도 한데 얘도 참 둔했지. 본드는 제 손을 제 볼에 대고 온도를 가늠했어. 차가운 게 딱 좋군. 본드는 망설임 없이 큐의 뒷목을 잡아챘어.

 

 

 

“아.. 으..”

 

 

 

꽝, 소리가 났어.

 

 

큐는 갑자기 닿는 서늘한 감촉에 말도 못 하게 놀랐어. 소리도 못 지르고 그대로 주저앉았다가 본능적으로 다리를 세우고 웅크렸어. 뭔지 모를 감촉이 무서웠거든. 무게가 얼마 안 나가서 큰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무릎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뼈가 깨질 것 같았어. 뭐지? 뭐가 닿았지? 판단이 서질 않으니까 더 무서웠어. 어릿어릿한 무릎과 뒷목의 서늘함 중에 뭐가 더 충격적인지 헷갈려하고 있는 큐를 보며 본드가 소리 내 웃었어. 소리 없이 큰 리액션은 언제 봐도 재밌었어. 차라리 소리라도 빽 지르면 듣기 싫어서라도 안 할 텐데 이건 뭐.. 할 때마다 보는 맛이 있었어.

 

 

 

“굿 이브닝, 큐.”

 

“떠블..”

 

 

 

큐는 정신을 못 차리고 어영부영 하다가 뒤를 돌아봤어. 본드가 밝게 웃고 있었어. 뭐였지? 하고 생각하는데 본드가 찬 손을 다시 한 번 목에 댔어. 얼떨떨하며 몸을 흠칫거리자 널 놀라게 한 게 이거라고 알려주듯 볼을 두드렸어. 큐는 이런 장난을 당할 때마다 난 본드와 친해진 걸까? 이게 이 사람의 방식일까? 하는 생각에 혼란스러웠어. 그리고 사실은 좀 기뻤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어. 놀라고 혼란스러워서 앓기만 하는 큐를 보며 본드가 호탕하게 웃었어. 큐는 그런 웃음에도 조금 떨렸어. 빨개진 얼굴을 푹 숙였지. 이제야 아, 나 얼굴 푸석푸석한데.. 생각이 났어.

 

 

 

“여기까지 웬일이야.”

 

 

 

순간적으로 당신을 보러 왔다고 대답할 뻔한 큐가 입술을 꼭 씹었어. 나랑 말한다. 본드가 웃으면서 나 본다. 나랑 친근하게 말하고 있어. 나랑 논다. 큐는 헤벌쭉 풀리려는 얼굴을 억지로 굳혔어.

 

 

 

“그냥요. 산책 겸..”

 

 

 

큐는 본드를 보지 않고 대답했어. 큐 생각엔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는데 본드는 수긍하는 듯했어.

 

 

 

“하긴, 매일 그 소파에 누워있으면 엉덩이가 배기긴 할 거야.”

 

 

 

큐가 소파에 누워있는 걸 몇 번 본 본드가 일부러 혼내듯 빈정거렸어. 하지만 심장박동수가 말 못하게 빨라진 큐는 알아차리지 못 했어. 큐는 눈치 없이 감상에 젖어서 본드의 손이 닿았던 볼을 쓸어 만졌어.

 

 

 

“몸이 찌뿌둥하면 운동으로 풀어야지.”

 

 

 

큐가 맹하게 볼을 문질러대는 사이, 본드가 큐의 팔을 잡아채 당겼어. 큐는 딱히 몸이 찌뿌둥한 건 아닌데요. 하고 정정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나와서 좀 당황했어. 다리가 후들거려서 일어나지도 못 하겠는데 갑자기 일으켜진 큐가 휘청거렸어. 그러거나 말거나, 본드가 큐의 골반을 양 손으로 잡았어. 속에선 으악, 악! 본드 손이, 손이! 어디에! 어디! 온갖 비명이 난무했지만 겉으로 큐는 작게 앓을 뿐이었어. 상황을 모르거니와 알아줄 생각도 없는 본드가 그대로 큐를 어깨에 짐처럼 들쳐맸어.

 

 

 

“아, 본드, 좀 토할 것 같은.. 저..”

 

 

 

발이 땅에서 떨어지자 아찔해진 큐가 허우적거리며 본드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어. 속에선 여전히 여기저기 번쩍이고 비명이 올라왔는데 나오는 말은 겨우 저거였어. 본드는 큐의 말 따위는 모조리 무시하고 트레이닝실 입구로 향했어. 일부러 더 걸음을 들썩거렸지. 큐는 사람한테 올라타도 비행기 공포증이 발현되는 구나, 싶었어. 그 상황에도 이건 몰랐네.. 하는 맹해빠진 생각을 했지. 감기기운까지 겹쳐서 눈앞이 얼금얼금해지는 걸 느끼며 큐는 달달 떨었어. 식은땀이 솟아서 옷깃을 적셨어.

 

 

본드는 그러거나 말거나, 였어. 여전히 말이야.

 

 








 

 

 

*

 

 

 








 

 

큐는 이대로 죽으면 안될까.. 생각을 하고 있었어. 찌뿌둥하면 운동을 하라고 하던 본드는 큐를 매트 위에 던져 놓고 애초의 말과는 다르게 억지 스트레칭을 시키고 있었어. 떠블오 세븐, 이건 운동이 아닌데요. 하고 큐가 최대한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대응해 봤지만 허사였어. 본드는 듣는 척도 안 하고 큐의 팔이나 다릴 잡아당겼어. 큐의 입장에선 안 그래도 피곤한데 사람 비행기 어택까지 당해서 더 느려진 몸이 말을 안 들어서 반항을 못 한 거지만 본드의 입장에선 큐가 자신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것 같았어. 상당히 뻣뻣한 인형놀이를 하는 기분이었지.

 

 

 

“너처럼 뻣뻣한 사람도 드물 거야.”

 

“평범하게 통나무 같다고 말해요. 그냥.. 그런 말은 익숙하니까.”

 

“녹슨 양철도 너보단 부드럽겠다.”

 

 

 

본드를 말리기도 지친 큐는 삐걱거리며 입을 다물었어. 눈이 헤롱헤롱 감기는 것 같았어. 본드의 어깨에 매달릴 때 솟은 식은땀으로 뒷목이 싸늘했어. 처음엔 본드가 손이나 손목 같은 곳을 잡으니까 좀 설레기도 했는데 이젠 그것도 둔감했어. 그냥 다 싫고 얼른 놔줬으면 싶었어. 기지개켜는 것도 싫어하는데 이런 스트레칭을 당하니 싫고 아파서 눈물이 그렁그렁 했지. 아까 본드가 허리를 풀어준다고 등을 바닥으로 눌렀을 때는 진짜 울음이 터질 뻔했어.

 

 

 

“물 줄까?”

 

 

 

한참 큐를 가지고 논 본드가 손을 놔주며 물었어. 큐는 뭐든 이것만 아니면 좋아서 끄덕였어. 나름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는데 본드에겐 느릿느릿으로 밖에 안 보였지. 아까부터 인형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본드는 지금 조금 다른 의미로 큐가 인형 같다고 생각했어. 그러고 보면 꽤 하얗고 말랑말랑한 게 봉제인형 같기도 하고..

 

 

본드가 물통을 열어 내밀었어. 큐는 입을 대고 마셔도 되나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젖혀 마셨어. 고개를 젖히자 천장이 노랬어. 어찔함이 가시길 눈을 감고 기다리다가 될 대로 되라 싶은 마음에 픽 누워버렸어. 더 이상은 눈 뜰 힘도 없었어. 본드의 웃는 소리가 들렸어. 곧 감길 것 같은 눈에 힘을 주며 큐가 본드를 올려봤어. 본드는 그 눈빛이 노려보는 거라고 생각했어. 안 어울리게 앙칼진 눈빛은.. 본드는 이유 모르게 유쾌해졌어. 큐 옆에 앉아 마른 손목을 들었다가 떨어뜨리듯 손을 놨어.

 

 

 

“뭐가 이렇게 뻣뻣해?”

 

“제 탓 아니에요.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요.”

 

 

 

큐는 내가 지금 잠들어 가는지 기절해 가는지 죽어 가는지 모르겠는 심정으로 대답했어. 본드의 눈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묻어 있었어. 본드는 큐의 눈이 감길 때마다 코나 볼을 쿡쿡 손가락으로 찔렀어. 잠 생각밖에 안 나는 큐는 암만 상대가 본드라고 해도 짜증이 났어. 손을 쳐내고 싶은데 천근만근인 팔은 움직일 줄을 몰랐지. 대신 본드가 찌를 때마다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싫다는 티를 냈어. 반응을 하니까 더 괴롭힌다고는 꿈에도 몰랐어.

 

 

큐가 눈을 감길 기다렸다가 찌르고, 다시 기다렸다 건들고.. 한참 큐를 콕콕 찌르며 장난치던 본드는 본의 아니게 잠들어가는 큐의 얼굴을 내려 보게 됐어. 코를 찡긋거리던 반응이 한 박자씩 느려지고 눈꼬리가 옅게 떨렸어. 그러다 감은 시간이 길어지고, 힘겹게 떠올리다가 나중에는 뜬 눈 초차 게슴츠레 했어.

 

 

 

“큐.”

 

“응?”

 

 

 

자? 하고 물으려고 했는데 큐가 콧소리를 내며 대답했어. 입을 열 체력도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야. 거의 잠이 든 큐가 콜록거리며 옆으로 웅크렸어. 추운지 바닥을 더듬던 손이 본드의 무릎에 닿았어. 살짝 눈을 떠 뭔지 확인하는 듯 했는데 중요하지 않았든, 보기만 하고 인식하진 못 했든 한 것 같았어. 아니면 제 생각에 그래도 될 것 같았던지. 큐는 본드의 무릎을 덮은 트레이닝복을 돌돌거리며 만지다가 살짝 쥐었어. 뭐라고 웅얼웅얼 말을 했는데 뭐라고 하는지 본드는 알아듣지 못 했어. 반 이상이 콧소리였거든. 이유는 모르겠는데, 정말 모르겠는데.. 본드는 그걸 보며 숨을 죽였어. 피곤한 애를 괴롭혔나 싶어서 좀 미안하기도 했고 얘는 왜 이렇게 잠이 많나 싶기도 했어. 본드는 움직임을 멈췄어. 큐가 잠들 때까지, 자기도 모르게.

 

 

 

잠든 모양이야. 본드의 바지를 잡고 있던 큐의 손이 사르르 풀렸어. 눈도 완전히 잠겼지. 본드는 풀어진 손을 잡아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선뜻 손이 나가진 않았지만. 다행히 말이야. 매트로 떨어진 큐의 손이 조금 움찔거리다가 바닥에 닿은 다리 밑으로 끼어 들어왔어. 의외의 행동에 본드가 움찔했어. 체온을 확인하듯 꼼질대던 큐가 곧 따듯한 숨을 뱉었어. 그리고 안심하듯 쌕쌕거리며 잠에 빠졌어.

 

 

그 바람에 본드는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는데 이걸 설명할 수가 없었어. 자신의 체온에 안심하고 잠드는 사람은 본 적도 없거니와 상상도 못 했어. 자신의 직업과, 옆에 잠들었던 누군가들의 체온이 스쳐지나갔어. 지금 드는 감정은 꼭 이것들만도 아니었지. 어떻게도 설명할 수가 없었어. 목 아래가 울컥거렸어.

 

 





 

 

 

큐를 한참 보고 있던 본드는 큐가 언젠가처럼 낑낑거리는 잠꼬대를 한 후에야 정신을 차렸어. 너무 넋 놓고 보고 있었던 것 같아. 뒤늦게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어. 운동을 하던 동료와 눈이 마주쳤어. 어깨를 살짝 으쓱해 보인 동료가 눈짓으로 거울에 비친 큐를 가리켰어. 괜히 속이 뜨끔한 본드가 큐의 잠든 얼굴을 확인했어. 해 본 적 없는 생각인데.. 왜 이렇게 무방비하나 생각이 들었어.

 

 

본드는 걸쳐 입었던 옷을 벗어 큐의 어깨를 감싸 주었어. 큐가 앓는 소리를 내며 더 웅크리고 옷 밑으로 기어들었어. 그제야 추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 트레이닝실은 시원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거든. 자기엔 추울 것도 같았어. 본드는 웅크린 큐의 코 아래부터 엉덩이까지 옷을 잘 펴 주다가 문뜩, 엄청 작구나, 하고 생각했어. 키는 비슷한데 몸집이 자신과 비교할 수 없도록 작았어. 마르기도 마른 건데 뼈 자체가 동글동글 조그만 모양이었지. 정장바지 아래로 보이는 발목을 잡아봤어. 한 손에 잡히는 게 이상한 기분이었어. 구두는 신고 들어올 수 없다면서 억지로 신발을 벗겼더니 더 체온이 내려갔는지 싸늘했어. 처음으로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며 본드는 큐의 등과 골반 즈음을 토닥였어. 응, 으응.. 하고 앓는 게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분간이 가질 않았어. 다시 큐의 얼굴을 봤다가, 거울로 동료를 훑어 본 본드는 괜한 기분에 큐의 이마까지 옷을 끌어 올렸어. 탓에 무릎이 드러난 큐가 몸을 잘게 떨었어. 파들거리는 걸 보자니 뭔가를 더 덮어줘야겠다 싶었지만.. 주변을 둘러본 본드는 가만히 자리를 지켰어. 큐에게 닿는 타인의 시선을 등으로 막아내면서.

 

 

그런데 세상에, 얘가 무방비하다고 생각하다니.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본드는 좀 전에 한 자기 생각을 믿을 수가 없었어. 하는 거라곤 사람 한심하다고 말하는 듯한 무표정 짓는 것밖에 없고 싸가지 싹쑤는 물론이요 말랑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철벽한테? 뻔뻔하고 사람 무시하기 좋아하고 시큰둥하고 그런 앤데, 얘가.. 애한테 내가 뭐라고 생각한 건지. 본드는 너털너털 웃음소리를 냈지만 자연스럽진 않았어.

 

 

자꾸 웅크리는 큐의 등으로 손을 뻗었다가 닿질 못 하고 배회했다가, 아니 내가 좀 이상한데? 싶어서 깨울 듯 퍽퍽 토닥였다가, 다시 미안해서 부드럽게 쓸어주길 반복했어. 본드는 내가 진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6.









큐브랜치 형 누나들은 자뭇 심각한 표정으로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어. 몇 시간째 어린 쿼터 마스터의 행방이 묘연했거든. 큐브랜치엔 당연히 없었고 전산망을 뒤져봤는데 숙직실 입실기록도, 퇴근기록도 없었어. 정보 보안의 문제로 쿼터마스터의 승인 없인 야근도 못 하는 형 누나들은 발을 동동 굴렸어. 퇴근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걸 어기고 찾아 나설 수는 없고 그냥 퇴근하기엔 어린 동생(쿼터마스터)이 너무 걱정됐어.



아까 꼬무적 꼬무적 사무실로 들어가는 걸 본 사람은 있는데 신기하게 나가는 건 아무도 못 봤어. 밥 먹자고 무단 침입했을 때 비어있는 걸 보고 다들 당황했으니까. 언제나처럼 잠을 채우나 했는데 대체 어디 간 건지 모르겠어. 오겠지, 하고 남겨둔 비프 샌드위치가 싸늘하게 식어있었어. 우리한테 퇴근카드 잘 찍고 가라고 하더니 본인은 딴 데 간다는 소리였나? 어련히 돌아오겠지 하며 느긋하게 샌드위치에 맥주를 걸쳤는데 예상외의 무소식에 초조해졌어.



설마 길을 잃었을 리는 없지만 최근 쿼터마스터가 동생이라는 걸 인지한 형 누나들에겐 그것도 하나의 잠정적 가설이었어. 술기운까지 은은하게 올라서 동생취급이 주체가 안 됐어. 휘청거리다 어디 박고 쓰러진 건 아니냐, 걷다가 잠든 건 아니냐 썩 믿음직하지 않은 가설이 두서없이 오고 갔어.











본드가 큐브랜치에 도착했을 때도 상황은 같았어. 다들 술기운에 불콰해 져서는 탁상공론을 펼치고 있었어. 본드는 거기에 낄 생각이 없었어. 주제 상관없이 사무직의 토론에 끼면 못 알아듣고 머리만 아프거든. 본드는 소리 없이 큐의 사무실로 들어갔어. 외투와 가방을 챙겨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거긴 늘 그렇듯 아무 것도 없었어. 외투를 안 입고 다니나? 외부에서 보면 늘 너구리같은 야상을 입고 있었는데.. 하지만 큐의 개인 사무실엔 아무것도 없었어. 옷은커녕 팬 한필조차 없는 게 꼭 안 쓰는 방 같았지. 본드는 얼굴을 찡그렸어. 사무실에 생활감이 없는 게 기가 찬데 왠지 화는 다른 쪽으로 났어. 차도 없는 주제에 얇게 입고 다니니까 감기에 걸리지. 왠지 모르게 그 쪽으로 화가 났어.




조금 전의 일이었어. 큐를 내려 보던 본드는 동료들이 다 사라지고 나서야 큐를 가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어. 그 전에 일어나도 상관없었지만 그러기 싫었어. 자신의 괜한 고집에 혀를 찬 본드는 서둘러 락커로 향했어. 잠결에 체온이 올라가면 괜찮겠지, 싶던 큐가 아직도 간헐적으로 떨고 있었거든. 본드는 옷을 가져와 몇 겹으로 큐를 덮었어.



몸을 꽁꽁 감싸놓은 본드는 큐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얼굴을 덮었던 옷만 조금 걷어냈어. 이런.. 큐의 얼굴이 열로 빨갛게 익어 있었어. 괴로운지 찡그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어온 에어컨 바람이 힘들었는지 콜록거리기까지 했어. 기침소리가 잔뜩 쉬었어. 목이 부은 모양이야. 깨울걸 그랬나.. 본드는 자기도 모르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 큐의 볼을 만지다가, 자신이 대체 뭘 하나 싶은 생각에 얼른 손을 떼고 머리를 긁적였어.



큐의 볼이 뜨거웠어. 후끈한 온도에 본드는 큐의 이마와 겨드랑이의 온도를 가늠하며 제대로 살폈어. 열이 펄펄 끓고 있었어. 큐의 상태를 너무 늦게 알아차렸나봐. 대체 언제부터 이랬는지, 원.. 자신이야 총알을 박아 오지 않는 이상 앓아눕지 않으니까 몰랐다고 스스로 변명해봤지만 죄책감이 줄어들진 않았어. 아니 아프면 말을 하든가 아니면 티를 내지.. 오늘도 늘 그런 무표정이던 큐를 오히려 탓했어. 하지만 전혀 기분이 나아지 않았지. 떨리던 마른 몸이 눈에 선했어.



본드가 어깨를 살살 흔들며 이름을 불렀지만 큐는 일어나지 못 했어. 잠깐씩 눈을 뜨긴 했는데 그게 다였지. 큐는 힘들어하며 다시 눈을 감고 앓았어. 이대로는 억지로 깨는 것도 무리가 갈 것 같다고 판단한 본드가 트레이닝실의 온도 조절 시스템을 끄고 걸음을 서둘렀어. 의무팀에 가 감기약을 받고 곧장 큐브랜치로 올라갔어. 큐의 짐을 챙겨서 플랫에 데려다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막상 오니 그놈의 옷이며 짐을 찾을 수가 없는 거야. 쿼터마스터니까 예상치 못 한 깊숙한 곳에 숨겨 뒀을지도 모른다고 잠깐 생각했지만 그럴 리가 없는 걸 알고 있었어. 그런 건 선대 쿼터마스터의 취향이고 큐는 심플 이즈 베스트라는 생각으로 산다는 걸 본드도 이젠 알았거든. 지내다 보니까 그랬어.











*










큐는 덜덜 떨면서 잠에서 깼어. 몸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렸어. 정신은 없는데 몸이 너무 아파서 깬 거였지. 콜록거리는 기침이 멈추질 않고 눈가가 뜨거웠어. 토할 것 같아.. 본능적인 욕구에 몸을 일으키던 큐는 자신이 낯선 곳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어. 불이 반 쯤 꺼진 트레이닝실이 싸늘했어. 나 왜 여기 있지? 큐는 뜨거움 침이 고인 입가를 쓸어 닦았어. 괴로워. 속도 울렁거리고 머리도 아프니 움직일 수가 없잖아. 열 기운에 짜증이 치솟은 큐가 스스로에게 칭얼거렸어. 바닥을 짚은 팔까지 오한으로 떨렸어. 몸을 일으킬 자신이 없어서 다시 꼬구라진 큐는 웩, 소릴 내며 입을 막았어. 어지럽고 답답하니 당장이라도 게워낼 것 같았어. 절대 여기서 토하면 안 된다고 생각은 하는데 속은 계속 안 좋고 몸은 떨렸어. 어디지, 몇 시지.. 추워. 큐는 몽롱하게 아무 말이나 웅얼거리며 웅크렸어. 왜 이렇게 어지러워.. 큐는 눈을 감고 어지럼증이 나아지길 기다렸어. 흐려지는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눈썹을 꼭 모아야 했어.











*











“큐는 외투를 안 입고 다니나?”



“악! 젠장! 깜짝이야! 더블오 세븐! 기척을 내고 다녀요!”




결국 본드는 밖으로 나가 큐브랜치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어. 열심히 우리 애가 어딜 갔을까 토론하던 직원들이 본드를 돌아봤어. 몇몇은 온 지도 몰랐던 탓에 경기하듯 소릴 질렀어. 본드는 대답이나 하라는 듯 턱을 추켜들었어.




“안 입긴요. 날씨 상관없이 늘 입잖아요. 그 칙칙한거.”


“어딨지?”




직원들이 큐의 책상을 쳐다봤어. 본드도 시선을 따랐지. 큐브랜치 구석에 붙어있는 책상은 다른 것들과 같은 모델이었어. 의자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잘 닦아서 엎어 놓은 ‘Q’ 머그잔과 너구리 야상, 안경닦이며 랩톱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어. 메모지와 볼펜 한 자루만 자리를 잃고 아무렇게나 굴러가 있었어.











*











에어컨 바람이 미미하게 남은 실내가 불편했어. 큐는 건조한 거 싫어, 힘들어. 하고 상황에 맞지 않게 투정했어. 콜록거리는 기침이 연이어 나왔어. 큐는 살이 아리는 팔뚝을 문지르며 느리게 걸었어. 복도 바닥이 농구공처럼 튀어 올라와 이마를 때릴 것 같았어. 왜 이렇게 어지럽지? 어쨌거나 일단 급한 건 그게 아니었어. 큐는 울렁이는 속을 해결하기 위해 입을 막고 화장실로 들어갔어. 분명히 똑바로 걷고 싶은데 문이나 벽에 어깨를 부딪히는 걸음이 자신이 느끼기에도 비실비실했어.



변기통을 붙잡긴 했는데 별로 나오는 건 없었어. 목 뒤에서 신맛이 올라오는데 뱉고 보면 침이 다였어. 큐는 더우면서 추운 묘한 느낌에 웅크려 앉아 숨을 몰아쉬었어. 자신의 콧김이 너무 뜨거워서 버거웠어. 큐는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싸 잡고 제 팔에 이마를 비비며 끙끙 앓았어. 갈수록 두통이 심해지는 데 도대체 왜 이런지 모르겠어.




튜브 탔는데 졸다가 못 내리면 어떡하지? 아.. 진짜 싫다. 문 열면 바로 집이었으면 좋겠어. 도라에몽 문이 필요해. 도라에몽.. 도라에몽을 만들면 좋겠다. 미리 만들어 놔야 무인도에 떨어질 때 가지고 갈 텐데. 하긴, 난 무인도에 갈 일이 없지. 그럼 본드한테 주면 괜찮을까? 너무 크고 느려서 걸리적거리려나.. 그럼 난 좀 더 고양이답게 만들어야지. 레이디 큐큐만큼 슬림하고 작게. 그럼 부품이 너무 초소형이어서 힘들까? 아냐 레이디 큐큐는 뚱뚱하니까. 어쨌든 목 졸려 보이는 빨간 목줄 같은 건 안 달아줄 거야.




갈수록 제대로 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어. 큐는 얼굴을 비비며 어물어물 이상한 생각을 하다가 더워.. 하고 정수리를 화장실 문에 비비적거렸어. 화끈거리는 귀 안이 가려운 지경이었어. 뜨거운 숨을 위로 뱉어내다가 추스르고 일어났어. 증세가 더 심해진다는 자각은 있었거든. 더 심해지기 전에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밖으로 향했어.




큐는 건물 출입구까지 와서야 자신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어. 홀홀단신 야상도 없었어. 지갑도. 지갑은 야상 안에 있었지. 큐브랜치까지 올라가기엔.. 너무 머네. 큐는 착찹하게 얼굴을 문질렀어. 코와 마른 볼을 손바닥으로 뭉갰어. 관자놀이가 쿵쿵 뛰고 귀 안도 가려웠어. 중지로 귓가를 꾹꾹 누르는데 소리까지 울렁울렁했어. 아, 모르겠다. 일단은 좀.. 시원한 거. 주변에 마실 걸 찾았는데 마땅한 게 있을 리가 없었어. 큐는 대신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댔어. 좀 나은 것도 같고 살이 더 아리는 것도 같았어. 끙끙 앓으며 미끄러져 내렸어. 자각 없이 웅크려 앉은 꼴이 됐어. 오분, 오분만 딱 이렇게 있어. 오분만 있다가 올라가서 지갑과 랩톱을 챙겨 오자. 큐는 자신의 몸과, 혹은 자신을 괴롭히는 어지러움과 타협을 봤어. 쌕쌕거리는 숨이 뜨거웠는데도 큐는 제 몸의 열을 자각하지 못 했어.












*











트레이닝실에는 본드의 옷만 남아있었어. 본드는 큐브랜치 직원들이 챙겨준 랩톱과 야상, 샌드위치를 주렁주렁 들고 의무실로 향했어. 정신을 못 차리더니 일어나긴 했군. 차라리 다행이었어. 완전 뻗어버린 건 아닌 모양이야. 게다가 찬 바닥에 지금껏 누워있는 것보다 의무실 침대가 나았지. 본드는 정신을 차린 큐가 제 몸 상태를 체크하고 의무실에 갔을 거라는 예상을 의심하지 않았어. 죽고 싶은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그 몸을 하고 달리 어딜 가겠어.



의무실 침대는 비어 있었어. 좀 전에 본드에게 감기약을 챙겨줬던 진만 무료하게 앉아 랩톱으로 영화를 보고 있었지. 본드가 큐는? 물었는데 진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단 눈치였어. 쿼터마스터가 여길 왜 오겠어요. 여기 오는 사람은 대부분 무리하게 운동하다가 다친 근육몬들이라고요. 그나저나 더블오 세븐, 오늘은 짐이 많네요. 진은 원하는 대답 대신 본드가 달고 있는 것들에 관심을 보였어. 그 엄청 안 어울리는 것들은 뭐에요? 야상에 샌드위치에, 그거 랩톱가방 아니에요? 랩톱이라니, 휴대폰 메신저는 보낼 줄 알아요? 생각보단 덜 늙었나 봐요. 게다가 샌드위치? 밀가루를 먹긴 하네요. 본드는 시덥지 않은 농담을 건네는 진에게 일방적인 인사를 하고 돌아 나왔어.



짐을 챙기러 갔다가 길이 엇갈렸나 싶었어. 본드는 큐브랜치와 트레이닝실에 다시 한 번 들렸어. 큐브랜치는 직원들이 모두 퇴근해서 보안상태였고 트레이닝실은 본드가 마지막으로 본 그대로였어. 본드는 머리끝이 찌릿하고 서는 느낌에 찡그렸어. 가만히 자빠져 누워 있을 것이지 어딜 가서 이렇게 돌아다니냐고 아무도 안 들을 욕을 중얼거렸어. 하지만 속은 초조했어. 당장 큐를 눈앞에 가져다 놔야만 이 불쾌한 감정이 사그라들 것 같았어. 오늘따라 계속 치고 오르는 이상한 기분들이 유쾌하지 않았어. 본드는 큐의 짐을 내려놓을 생각도 못 하고 바지런히 다리를 놀렸어.











*











큐는 입술을 적시는 시원함에 정신이 들었어. 정신이 들고 나서야 아, 내가 정신을 잃었구나.. 하고 생각했어. 그러나 저러나 입에 닿는 액체가 달았어. 생각조차 흐려질 정도로. 큐는 조금 더, 조금 더 하는 마음에 고개를 젖히며 꼴딱꼴딱 받아 넘겼어. 조금 후 물줄기가 약해졌을 때는 성에 차지 않아 낑낑거리며 양 손으로 당겨 잡았어. 눈도 못 뜨면서 방향을 따라 고개를 내밀고 더 달라고 졸랐어.




“정신 차려.”


“응.. 음.”




본드는 물통에 매달려 있는 큐를 보며 한숨 쉬었어. 처음 유리에 기대 웅크린 걸 봤을 땐 당장이라도 후들겨 패주고 싶었는데 이제는 뭐로라도 감싸주고 싶었어. 사실 미련하다고 혼낼 생각으로 다가갔는데 숙인 목 뒤로 식은땀이 축축하게 돋아난 걸 본 순간 그 생각이 사그라든 거였지. 큐의 와이셔츠가 식은땀으로 온통 젖어 있었어. 본드는 이렇게 땀을 흘리며 앓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어. 생사를 헤매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지. 수분을 낭비했으니 채워줘야겠다고 물을 먹이긴 했지만 이렇게 달게 받아 마실 줄도 몰랐어. 망아지가 젖을 빨듯 물통을 쪽쪽거리는 게 안쓰러우면서도 기분이 나빴어. 분명히 기분이 나쁜데.. 본드는 큐의 이마를 한 손으로 감싸 살살 만져줬어. 손이 부드럽게 이마를 오고갈 때마다 큐는 물을 마시면서도 목으로 응, 응, 하고 앓았어. 큐는 생수병을 다 비우고서야 꾸르르, 같은 이상한 물이 넘어가는 소릴 내며 늘어졌어.



본드는 한숨을 쉬며 큐를 안아 들었어. 의무실로 향하며 속으로 온갖 욕을 했는데 그게 뭘 향한 건지는 몰랐어.






















7.







큐는 링거가 바닥을 보일 때 쯤 눈을 떴어. 여전히 입이 마르고 몽롱하긴 했지만 훨씬 나았어. 내가 어디에 왜 누워있나, 를 헤아리다가 좀 전의 감각을 떠올렸어. 그제야 자신이 아팠다는 걸 알았지. 열 기운에 어지럽던 걸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어. 생각을 관두고 푹신한 베개에 볼을 비볐어. 조금 더 잠들고 싶을 정도로 나른했거든. 침대를 둘러싼 커튼 밖에서 티비 소리인지 소곤소곤한 말소리가 들렸어. 자장가 같았어. 큐는 가슴을 덮고 있던 이불을 당겨 어깨를 감쌌어. 누구 목소릴까, 하고 생각했지만 누구 목소린지 진심으로 생각해 보진 않았어. 그냥 이대로가 편안했거든.



본드는 사박거리는 커튼 너머의 소리에 집중했어. 천끼리 쓸리는 소리에 깼나했더니 다시 소리가 없어졌어. 미동도 없이 자던 애가 드디어 뒤척인 모양이야. 나 원, 자다가 쥐나겠군. 그 작은 소음이 반가웠지만 일부러 툴툴거렸어.



진이 앞에서 떠들고 있었지만 본드는 내내 비프샌드위치를 보고 있었어. 입은 대답을 해도 머리는 저녁도 안 먹은 건가,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잠버릇도 없이 자나 생각하고 있었지. 스스로 의식하진 못 했지만 온 신경이 커튼 너머 큐의 움직임에 쏠려 있었어.











*












한참 만이었어. 본드도 슬슬 졸려지려 할 때 쯤 이었지. 큐의 기척이 변했어. 본드가 그 예민한 변화를 눈치 채고 커튼을 열었어. 큐는 거즈가 붙어있는 저릿한 팔을 보고 있다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어. 커튼을 걷은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어. 큐가 더블오 세븐.. 하고 앓듯 불렀어. 본드는 그 앓는 듯 한 소리가 마음에 안 들었어. 열병이라고 했는데 왜 목까지 쉬었는지 이해가 안 됐어. 본드는 아직도 아픈가, 열 말고 다른 곳이 아픈 건 아닌가 걱정했어. (정확히는 진이 돌팔이라 잘못 진단한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었음) 그러면서도 자신이 지금 과하게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 본드는 내가 왜? 하는 생각에 괜히 더 군인말투로 물었어.




“이제 완전히 깼나? 정말 잘 자는 군. 몇 신 줄은 아나?”


“모르죠.”




상황판단 전에 등장한 본드 때문에 당황한 큐가 얼떨떨 솔직하게 대답했어. 자신이 한 말이 어떻게 들릴지 생각하기에는 저혈압, 감기 콤보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어. 반면 본드는 저 새끼가.. 싶었어. 다 죽어가는 걸 기껏 안아다 눕혀놨더니 하는 대답이 영 싸가지가 없었어. 축축 늘어지는 통에 추스르느라 고생 꽤 했지. 뻔뻔한 걸 알고는 있었지만 또 한 번 느꼈어. 하여간 귀엽다가도 마는 놈이었어. 본드는 삐딱한 마음만큼 삐딱하게 벽에 기대섰어. 워낙 빤히 보는 탓에 부끄러워진 큐는 허둥거리다가 몸을 일으켰어. 어색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달리 할 일이 없었어.




"감사인사를 좀 들었으면 좋겠는데, 큐."


“누구한테요?”




몸을 일으킨 큐는 본드를 힐끔거렸어. 끙끙거리던 통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안경이 더러웠어. 본드가 잘 안 보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 큐는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는 본드를 좋아했어. 다른 곳을 보는 모습도 물론 충분히 멋있었지만 마주보는 얼굴과 눈은.. 어떻게도 표현할 수가 없었어. 생각보다 아래로 쳐진 눈과 서슬퍼런 파란 눈이 어우러져서 자신을 볼 때마다 큐는 녹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분명 순한 눈인데 미간의 주름과 여러 가지들이 어울려서 투박해 보이는 인상이 좋았어. 풀어낼 수 있는 도식들과 딱 맞는 답이 정해져 있는 세상이 익숙한 큐에게는 본드의 그 모호함이 매력적이었어.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얼굴, 진한 인상을 쓰고 있다가 한 순간 풀리는 웃음, 매정한 것 같다가도 뜬금없는 장난을 걸어오는 행동들. 그 중에서도 그렇게 투명한 눈으로 읽을 수 없는 눈빛을 보낼 때가 가장 매력적이었지. 마주볼 때 그런 느낌은 더 선명해졌어. 큐는 자신을 미워하는지 애정하는지 알 수 없는 본드의 눈을 마주볼 때마다 주눅 들면서도 행복했어.



큐는 인상을 찌푸리며 안경을 벗어서 옷에 문질렀어. 마른 몸을 가리기 위해 입고 다니는 니트로는 아무리 닦아도 도움이 안 됐어.




"너한테."


"해야 하나요?"


"그럼. 덕분에 퇴근시간이 다섯 시간이나 지났거든."




큐는 닦이지 않는 안경이 답답해 찡그렸어. 결국 안에 입은 셔츠를 빼 안경알을 문지르기 시작했어.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다른 건 곧 잘 잊는 큐는 본드의 말에 대답하는 걸 잊었어. 다섯 시간.. 하고 본드의 끝말을 따라했을 뿐이야.



본드는 큐의 시큰둥한 반응이 얄미웠어. 너 때문에 내가 다섯 시간을 헛으로 보냈다고, 내가. 하고 윽박지르고 싶었어. 없어진 너 때문에 내가 MI6 건물 전체를 탈탈 털 듯 뒤졌고 마지막으로 간 입구에서야 정신을 잃은 널 발견해서 여기 데리고 왔고 진의 쓸 때 없는 헛소리를 들으면서 니가 깨길 기다렸고 덕분에 플랫에서 간단한 알콜을 마시고 릴렉스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놓쳤다고, 내가.



큐가 깨기 전까진 감사인사를 듣고 싶은 마음 따윈 없었는데 이젠 꼭 들어야겠다는 오기가 생겼어. 당장 더블 오 세븐, 저 때문에 고생하셨군요, 이렇게 신경 써 주시더니 고마워요. 라고 말해도 모자랄 판에 큐는 안경알이나 문지르고 있었지. 결국은 내가 널 걱정했고, 널 위해 이만큼 고생했다는 걸 알아줬으면 싶은 거였지만 본드는 깨닫지 못했어. 큐가 알아주지 않아서 사실 약간 삐졌지만 자신도 그걸 몰랐고 큐도 몰랐어. 대신 기분 나쁜 걸 온 몸으로 티내며 삐딱하게 큐를 보고 있었지. 나 이만큼 섭섭하다니까 알아 달라, 는 의미였는데 이것조차 깨닫지 못 했어.



큐는 안경알을 깨끗하게 닦을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집중했어. 안경을 쓰고 앞을 보며 깜빡였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닦았지. 본드의 기분은 점점 더 나빠졌어. 큐는 몇 번 더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여러번 눈을 깜빡인 뒤에야 본드의 얼굴을 마주봤어. 왜 저렇게 인상을 쓰고 있을까.. 큐는 멍하니 그런 생각만 했지.




“열두시가 넘었나요?”


“아니.”


“아직 괜찮네요.”




큐는 튜브 막차를 떠올리고 물은 거였지만 본드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어. 열두시도 안 넘었는데 생색내지 마라, 쯤으로 삐딱하게 들었어. 완전히 기분 상한 본드가 밖으로 나가 챙겨뒀던 큐의 물건을 침대 위로 쏟았어. 랩톱 가방과 야상, 샌드위치였지. 랩톱가방부터 소중하게 챙겨 안은 큐가 샌드위치를 물끄러미 내려 봤어. 그러다 본드를 쳐다봤다가 다시 샌드위치를 봤지. 벌써 몇 끼를 굶은 탓에 금세 침이 고이고 위가 쫀쫀하니 쪼그라드는 것 같았어. 일단 랩톱을 등 뒤로 잘 챙겨놓은 큐가 샌드위치를 집었어. 설마 나 밥 안 먹었다고 본드가 사다 놓은 걸까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어. 심지어 고기 샌드위치. 나 좋아하는 거.. 내 취향을 어떻게 알았을까 싶어서 큐는 본드를 빤히 올려봤어.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데 감동에 목이 막혔어. 큐는 입 안이 말라서 깔깔했지만 차마 마실 것도 주세요, 란 말은 못 해서 그냥 샌드위치를 뜯었어. 챙겨줘서 고맙다고 말하면 심장이 터지거나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감동했거든. 말은 못 하겠고 대신 맛있게 먹는 걸로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어.



큐가 그렇게 감동을 받고 샌드위치를 베어 무는 동안 본드는 더 기분이 상했지. 고맙다는 인사보다 지 배 채우는 게 먼저인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좀 줄까 말까 고민하는 듯 번갈아보다가 뺏어먹기라도 할 듯 양 손으로 잡고 먹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어. 그딴 거 줘도 안 먹어, 라고 빈정거리고 싶었어. 그러면서도 왜 큐가 먹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는 진 자신에게도 설명하지 못 했어.



큐는 퍽퍽해서 넘어가지 않는 샌드위치를 성심성의 것 끝까지 먹었어.











*











본드는 큐의 야상을 자신의 차 조수석에 던져 넣었어. 소리 없이 쫄쫄 따라오던 큐가 눈을 동그랗게 떴어. 분명히 자신이 아끼는 야상인데 본드가 자신의 차에 집어넣자 깜짝 놀랐지.




“저, 더블오 세븐, 그건 제 건데요.”




본드는 기가 막혔어. 누가 그걸 모르나? 이 날씨에 줘도 안 입을 너구리 야상이나 입는 건 이 영국에 저 뿐 일텐데, 누가 뺏어가기라도 할 줄 알았나.. 아니면 던진 게 기분이 상한건가? 아주, 물에서 건져놨더니 봇짐 내놓으라는 꼴이었어. 본드는 비웃음을 한껏 담아 웃었어.




“알아.”




큐는 본드의 말에 혼란스러웠어. 크게 뜬 눈을 깜빡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 큐는 본드가 자신을 태워줄 생각이라는 건 상상도 못 하고 있었어. 본드가 착각했는지 자신의 옷을 들고 앞서 가기에 달라는 소릴 못 해서 지하주차장까지 쫄쫄 따라오긴 했는데.. 안다고 하니까 이젠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야. 큐는 자신의 올바른 행동을 떠올리느라 가만히 서 있었어. 본드를 따라 오면서 조금씩 정신이 들고 머리가 돌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입구 앞에서 지갑이 없다는 걸 깨달은 다음부터는 기억이 없었어. 설마 자신을 본드가 옮겨 온 건가 싶었어. 그런데 그럴 리는 없을 것 같고.. 없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정신을 놓았을 때 보긴 했을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해지는 참이었지. 그러고 보면 앞에서 잠들기까지 했으니까 엄청 추했을 거야. 더 이상은 한 톨이라도 추태를 보이기 싫었지. 다른 때는 팽팽 잘만 돌아가면서 이런 상황에서는 돌아가지 않는 자신의 머리가 한탄스러웠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생각했지만 큐의 시스템엔 이런 상황이란 저장되어있지 않았어. 연애소설이라도 많이 볼걸.. 큐는 때에 맞지 않게 생각했어.



본드는 가만히 서 있는 큐를 보며 대체 뭐가 문제냐고 묻고 싶었어. 조수석 문을 활짝 열고 비켜 서 있는데 탈 생각이 없는 듯 보였지. 싫은 거야, 뭐야 대체. 본드는 괜히 자신의 차가 더러운지 살폈어.




“뭐해, 타.”


“뭐라고요?”


“타라고.”


“저요?”


“그럼 누가 또 있어.”


“왜요?”




큐는 아직도 본드가 자신을 데려다 줄거란 생각을 못 하는 중이었어. 본드는 짜증났지. 왜요? 왜요라니? 태워준대도 싫어? 오늘 하루 종일 시간 버려가며 돌봐줬더니 반응이 한 결 같이 왜 이래? 자신의 애마를 아끼는 만큼 자존심이 상하는 중이었어. 본드는 더 이상 말없이 본네트를 돌아서 운전석으로 가 앉았어. 큐가 슬금슬금 다가왔어.




“저, 본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큐는 그렇게 말하며 슬그머니 조수석으로 다가가 자신의 야상을 잡았어. 본드가 놓치지 않고 반대쪽 자락을 꽉 잡았어. 큐의 야상이 꾸깃하게 구겨졌어.




“타.”


“그러니까, 저는 이만 집에.. 피곤해서요.”


“그러니까 타라고. 데려다 줄게.”


“네? 어딜요?”


“플랫. 네 플랫이지 어디긴 어디야.”


“왜요?”




그러게, 왜? 본드는 큐의 말에 얼이 빠졌어. 그러게 아직 아픈 것도 아니고 밥이나 잘 먹고 멀쩡해진 애를 내가 뭐라고 에프터 서비스 하듯 집에까지 데려다준다고 나서고 있지? 소위 말하는 현타가 온 본드가 멍한 표정을 지었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큐가 다시 야상을 잡았어. 질세라 본드가 더 잡아 당겼어.




“그냥.”




본드가 고집스럽게 말했어.











*











결국 큐는 본드에게 밀쳐져서 차에 탔어. 답답한 본드가 반대쪽으로 돌아가서는 옷을 챙겨 떠나려는 큐를 구겨 넣었거든. 저는 튜브를 타고 집에 가면 된다고 버둥거리던 큐는 막상 차에 타고 나자 조용해 졌어. 본드의 손이 닿았던 부분의 옷자락을 당기며 조용히 앉아 있었지. 이렇게 좁은 공간에 같이 있어본 건 처음이라 숨소리조차 떨렸어. 그걸 숨기려고 최대한 입을 다물고 숨을 골랐어. 참지 못 할 정도로 떨려서 숨이 가빠지면 한숨 쉬는 척 큰 숨을 뱉었어. 본드 딴에는 구겨진 부분이 마음에 안 들어서 만지작거리는 걸로 봤지만 말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이 한숨은 한숨 그 자체로 보였고.



본드는 히터를 강하게 틀었어. 차 안은 조용하고 따듯했지. 이따끔 차가 도로의 요철을 밟고 약하게 덜컹이는 소릴 냈어. 혹은 밖의 소음이 부드럽게 파고들었지. 큐는 건조함에 코가 마르는 것 같았지만 따듯한 바람과 분위기에 몸이 노곤해졌어. 아직 완전히 나은 건 아니라 어깨나 팔의 살이 아렸는데 그게 다 녹는 것 같았어. 큐는 약 기운이며 나른한 차 안 분위기에 다시 잠이 쏟아졌지만 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버티는 중이었어. 그리고 본드의 차가 역을 지날 때마다 제발 내려주세요, 저는 큐브를 타고 갈게요. 하고 더 느린 목소리로 고집스럽게 졸랐어. 본드는 더 고집스럽게 대답도 없이 차를 몰았고 말이야.








다섯 번 째 역을 지날 때쯤이었어. 큐가 반 쯤 감긴 눈으로 웅얼거렸어.




“본드.. 저는..”


“좀 자.”




본드는 자신이 오늘 하루 종일 느낀 감정과 지금 느끼는 짜증을 정리하는 중이었어. 그리고 짜증의 근원이 서운함이라는 걸 막 깨달았어. 자신이 돌봐준 걸 몰라주는 큐에게 서운했고 기뻐해주지 않는 큐에게 또 서운했지. 왜 이런 유치한 감정을 느끼나 생각해봤는데 있을 수 없는 결론이 나왔어. 본드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을 재고하느라 말수가 줄었어.




“싫어요.”


“내가?”




본드는 자신도 모르게 물어놓고 흠칫했어. 운전 중이었는데도 대답이 신경 쓰여서 큐의 눈치를 살폈어. 큐는 영 맥을 못 추겠는지 그만큼 자고서도 또 꾸뻑거리고 있었어. 감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주긴 하는데 잠깐 뿐이었어. 빈속에 해열제를 한통이나 맞았으니 약 기운을 못 견딜만하긴 했지.




“아니요, 잠.. 자는 거요.”


“왜?”


“좋아.. 좋아서. 보여주기 싫어서..”




큐가 웅얼웅얼 미취학아동 같은 짧은 단어로 설명했어. 몽롱해서 자신이 뭐라고 하는지도 몰랐다가 말을 뱉고 나서야 눈을 번쩍 떴어. 큐는 내가 지금 뭐라고 말 한 거야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본드를 봤어. 하지만 오래가지 못 했지.




“보, 본드, 제.. 윽!”




서둘러 변명하려 했지만 급정거하는 차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했어. 큐는 갑자기 몸이 쏠려서 양손으로 안전띠를 붙들었지만 빠르지 못 한 탓에 안전띠에 가슴을 된통 압박당했어. 갑작스런 자극에 잊고 있던 기침이 터졌어. 고개를 숙이고 콜록거리는 큐의 뒷목을 본드가 잡았어.



대체 내 감정은 어디가 시작이야? 하고 자문하고 있던 본드는 큐의 말을 듣는 순간 핸들을 꺾었어. 갓길에 차를 대고 큐를 봤지. 기침하고 있는 마른 뒷목에 마음이 알싸해졌어. 자신의 체온에 안심한 듯 잠들던 큐가 떠올랐어. 한 순간이구나, 하고 본드는 생각했어. 깨닫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함께 깨달았어. 허벅지 밑으로 들어왔던 체온이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았어. 본드는 미처 핸들을 놓을 새도 없이 한 손으로 큐의 뒷목을 잡았어. 따끈한 체온이 손끝에 닿았는데 그게 얼마나 말랑하고 따듯했는지 몰라. 촉감이 달았어. 좀 전의 손처럼 말이야.



큐는 기침을 심하게 했어. 목에 비릿한 맛이 날 때쯤에야 물을 찾으며 고개를 들었는데,









그 때였어.



잡고 있던 목을 우악스럽게 끌어당긴 본드가 키스하기 시작했지.









큐는 잔뜩 얼었어. 본드를 밀어내지도 어쩌지도 못 하고 온 몸을 힘줘 웅크렸어. 곧 모은 다리가 떨리고 주먹 쥔 손도 발발거리기 시작했어. 입술에도 마찬가지로 힘이 들어가 있었는데 본드가 기술 좋게 큐의 목을 더 당겨 고개를 뒤로 젖히고 혀를 밀어 넣었어. 키스는커녕, 뽀뽀도 해 본 적 없는 큐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해석할 수도 없었어. 한 손으로 핸들을 쥔 본드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어. 큐의 떨림이 본드에게도 느껴졌어.



큐는 처음으로 강하게 느껴보는 타인의 체향에 눈앞이 어릿어릿해 지는 것 같았어. 본드가 다녀갈 때마다 아쉽게 남곤 했던 그 체향이.. 지금은 지나치게 가까웠어.



큐는 조금, 무서웠어.






본드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큐가 답답했어. 싫으면 밀던가, 아님 받아주던가. 큐는 그야말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 오기와 함께 정복감이 들끓었어.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것에 대한 답답함에 본드가 찡그렸어. 입술을 떼자 큐의 입술이 침으로 축축했어. 큐는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어. 뒤늦게 서야 입에 모인 본드의 침과 자신의 침을 모아 삼켰는데, 그 조차도 덜덜 떨려서 여러 번 나눠 삼켜야 했어.




“내가 좋다며.”




본드가 다시 입을 맞췄다 때며 말했어. 큐의 눈에는 본드가 화를 내는 것처럼 보였어. 큐는 무서움과 그 외의 감정들로 덜덜 떨었어. 뭐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어. 입술만 달싹거리는 큐를 보던 본드가 사이드를 땡기고 큐의 어깨를 밀었어. 반대편 유리로 밀려나던 큐는 본드의 손길을 따라 카시트로 파묻혔어. 몸을 일으킨 본드가 요령 좋게 조수석으로 넘어왔어. 레버를 당겨 등받이를 눕히고 의자를 뒤로 미는 것까지 순식간에 일어났어. 큐는 아무 소리도 반응도 못 하고 떨고만 있었어.




“내가 좋아, 큐?”




큐는 본드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어. 혼나는 것 같았거든. 무거운 침이 꿀꺽 넘어갔어. 본드가 큐 위로 올라탔어. 양 골반이 본드의 다리 사이에 갇힌 걸 보며 큐는 안전띠를 양 손으로 꽉 잡고 떨었어. 아니꼬운 본드가 안전띠도 풀어버렸지만 큐가 잡고 있는 탓에 말려 들어가진 않았어. 큐는 본드가 으르렁댄다고 생각했어. 더군다나 큐는 누군가와 이런 포즈로 있어본 적이 없었어. 세삼 느껴지는 체격차이와 압박감에 큐가 짧게 숨을 끊어 삼켰어.




“죄, 죄송.. 죄송해요.. 본.. 그게 아니, 아니라.. 실수..”




큐가 더듬거리며 사과했지만 말을 마치진 못 했어. 본드가 급하게 입술을 마주 댔거든 큐는 잡고 있던 안전띠를 더 꽉 잡으며 무서움에 본드의 가슴을 주먹으로 밀어냈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파고든 본드가 큐의 입술을 핥고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어.



큐의 몸이 펄떡였어. 기함하듯 숨을 크게 삼키는 탓에 본드의 입 안을 당겨 빠는 것 같았어. 본드가 더 깊게 입 맞추며 맨살을 더듬자 큐는 충격받은 듯 온 몸을 굳히고 더 심하게 떨기 시작했어. 본드는 큐와 닿은 피부로 느껴지는 떨림을 느꼈어. 달래주듯 맨살을 만지작거렸는데 보람 없이 심해질 뿐이었어.



















8.








다음날 큐는 결근을 했어.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고. 다다음날도 그랬어. 다행히 막 더블오 요원의 백업을 끝낸 상태니까 바쁜 시기는 아니었어. 그래도 문제였지. 큐의 결근, 것도 삼일이나 연달아서라니.. 이례적인 일이었어. 예상하지도 못한 일이었지. 때문에 큐브랜치는 아무런 대책 없이 큐의 공백을 느껴야했어. 큐브랜치 포함 모든 사무직 직원은 비상이 걸렸어. 다른 부서들도 난리였지. 첨단 기술을 담당하는 큐브랜치가 혼란스러워 일처리가 늦어지니 온 MI6가 느려졌거든.



특히 큐브랜치 형 누나들은 죽을 맛이었어. 그들은 새삼 큐의 업무량을 실감하고 있었어. 실력차도 말이야. 큐는 몇 번 클릭질과 눈 깜빡임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들을 알아내기 위해서 형 누나들은 마우스 노가다를 해야 했어. 마음 급한 딸깍 소리가 멈추질 않았어. 그들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일했지만 언제나 할 일이 남아있었어.



와중에 형 누나들은 좀 뿌듯했어. 큐의 공백을 온 몸으로 느껴보니 큐가 얼마나 좋은 상관이었는지 알게 되었거든. 직원들을 조아대긴 하지만 그보다 더 한 몫을 할 줄 아는 기특한 수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에 형 누나들은 잘 키운 막내 동생을 둔 듯 행복해졌어. 집에선 숫기가 없어서 걱정인 애가 학교에선 발표도 곧 잘하고 교우관계도 원만하다는 걸 공개수업에서 확인한 그런 기분이었지. 어쩜 이렇게 대견하게 컸을까.. 같은 마음이었어. 뭐, 그 조여대는 직원이 자신들이라는 게 약간의 문제였지만.




큐 몫의 일을 나누면서도 큐가 없어서 야근을 못 하는 형 누나들은 좀비같이 뛰어다녔어. 밥도 못 먹고 음료수 마실 시간도 아쉬울 정도로 시간에 쫓기는 중이었거든. 처음에는 꼼꼼하게 하던 일도 어쩔 수 없다며 날림으로 처리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문제가 터지면 금간 곳에 패인트라도 칠하는 마음으로 돌려막았어. 몇 번 그랬을까, 한 두 명이 비실비실 웃기 시작했어. 처음엔 웃을 시간도 없으니 일이나 하라고 여기저기서 잔소리가 터졌는데 이내 같이 웃는 걸로 변하기 시작했어. 큐브랜치 전체가 흐흐흑, 하하, 흑! 하는 왠지 무서운 웃음소리로 가득찼어. 본드가 큐브랜치로 올라온 것도 그 즈음이었어. 큐를 찾아 온 본드는 그 꼴을 보며 혀를 찼어. 다 같이 웃고 있는데 아무도 웃고 있지 않았지. 본드는 전에 봤던 큐의 책상으로 다가가 의자 등받이를 쓸었어. 의자는 온기라곤 찾을 수 없도록 식어있었어. 왠지 죄책감이 들었어.



키스를 한 날, 큐는 바들바들 떨어대다가 손살 같이 튀어나가서는 튜브를 타고 가버렸어. 본드는 나 같으면 차라리 택시를 탔겠다고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어. 하지만 그렇게 굳이 튜브를 타러 뛰어가는 뒷모습이 큐다워서 웃었어. 본드는 벌벌 떨던 큐를 떠올리며 입술을 쓸었지. 뻐킹 너드. 하고 중얼거렸는데 웃고 있었어.



좋아한다는, 그 잠결에 어린 어물어물한 말에 왜 그렇게 흥분했는지 모르겠어. 직전까지만 해도 큐와 입술을 마주댈 마음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었는데 말이야. 본드는 운전석으로 돌아와서 가로등을 올려봤어. 입맛을 다셨는데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건 몰랐어. 좋아한다는 말에 화끈하게 열이 올라서 자기도 모르게 차를 세우고 큐 위로 올라탔었어. 뻣뻣한 몸을 끌어당기며 억지로 키스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위에서 몸을 더듬고 있었지. 큐는 바들바들 떨면서 버티고 있었어. 즐기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버티고 있었지. 본드는 내가 강간이라도 하는 건가, 싫으면 싫다고 하지 왜 이러나 생각했지만 몸이 멈춰지지 않았어. 예상치 못하게 보들거리는 살을 훑어 내려갈수록 점점 더 아찔해졌어. 자신이 그런 하드한 취향이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오히려 떨어서 더 욕구가 일었어. 본드의 손이 유두에 닿는 순간, 큐가 기함을 하며 파득 거렸어. 뭘 어떻게 만진 것도 아니고 닿았을 뿐인데 온 힘을 다해서 밀었지. 그 꼴에야 본드는 깨달았어. 아, 이새끼 아다구나. 키스할 생각이 없었던 만큼 이렇게 끝을 볼 생각도 없었는데 본드는 그 순간 욕심이 들끌었어. 당장 가지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지. 본드가 큐의 바지에 손을 댔어. 아저씨 같은 굵은 벨트를 푸는 순간, 큐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어. 당황한 본드가 내, 내가 좋다며? 하고 답지 않게 더듬었어. 본드의 생각엔 내가 좋다면서 이건 싫은 큐가 이해가 안 됐어. 큐가 지금껏 본 모습 중에 가장 잽싸고 강한 몸놀림으로 자신을 밀치고 차를 빠져나갈 때 까지.



그러고 보면 참.. 알 수 없는 놈. 본드는 그렇게 도망갔다가 다시 주저주저 돌아와서 랩톱 가방을 빼가던 큐를 떠올리며 웃었어. 눈물로 축축한 얼굴을 손가락으로 비비며 가방을 끌어안던 모습이.. 귀여워 죽을 것 같았지. 너무 겁먹어 보여서 더 이상 진도도 못 빼고 짓궂게 다시 잡아채진 못 했지만 당장 잡아먹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어.



본드는 큐가 랩톱 가방을 챙기느라 미처 챙겨가지 못 한 야상을 전에 봤던 자리에 걸었어. 외투가 이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 출근길에 다시 감기에 걸리진 않을까 걱정하면서.











*











큐는 안겨 있으려 하지 않는 레이디 큐큐를 끌어안고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었어. 레이디 큐큐는 이미 아까부터 불만스럽게 큐의 가슴팍을 눌러대고 있었어. 불만스러운 꼬리가 퍽퍽거리며 큐의 아랫배를 때렸어. 하지만 큐는 팔에 힘을 주고 버텼어. 레이디 큐큐라도 없으면 자신의 머리가 어떻게 돼버릴 것 같았거든. 입 안에서 느껴지던 본드의 그, 그.. 그!!! 생각만 해도 얼굴이 달아오르고 온 몸이 근질거렸어. 하여간 내내 본드의 혀가 자신의 입 안에 돌아다니는 것 같았어. 헉, 혀라니. 큐가 부들부들 떨며 레이디 큐큐를 꼭 끌어안았어. 와아앙, 하고 성질이 한계까지 뻗힌 레이디 큐큐가 큐의 목을 긁었어.




“아야..”




아픔에 레이디 큐큐를 놓친 큐가 천천히 일어났어. 긁힌 목을 만져보자 피가 세어나오고 있었어. 끙.. 하고 짧게 앓다가 손에 묻은 피를 어쩌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봤어. 닦을 게 마땅하지가 않았어. 잠깐 이불을 보긴 했지만 이불 빨래를 할 생각을 하니 도저히 거기 닦을 수는 없었어. 결국 큐는 손가락을 쪽 빨고 다시 누웠어. 오른쪽으로 누웠다가, 다시 왼쪽으로 돌아누웠지만 여전히 속이 답답했어. 억지로 토해보려고도 했는데 헛수고였어. 잘못 먹어서 답답한 게 아니었으니까.



이불 위에서 뒤척이던 큐가 일어나 거실로 나갔어. 소파 위에서 털을 다듬던 레이디 디디가 큐를 발견하고 헐레벌떡 주방으로 뛰어가 숨어버렸어. 레이디 디디도 삼일 내내 큐에게 안김 고문을 당해왔거든. 큐는 레이디들까지 날 힘들게 한다고 소파에 웅크려 훌쩍였어. 파자마 밑으로 삐죽 나온 마른 발목이 오늘따라 더 얇아보였어.



큐는 내내 들었던 수치심과 상념이 치고 오르는 느낌에 머리를 감싸 쥐었어. 본드가 위로 올라타서 키.. 그, 그래, 그거.. 그.. 그걸 할 때 살짝 부풀었던 앞섶이 미치도록 부끄러웠어. 할 수만 있다면 아주 뜯어내고 싶었어. 큐는 대신 머리를 쥐어뜯다가 그래도 답답해서 소파의 패브릭을 깨물었어. 축축해 질 때까지 물어뜯다가 푹 엎어져 누웠어. 세상에 거기가 어디라고 반응을 하니.. 차 안에서.. 것도 본드의 차 안에서.. 큐는 수만, 수억 번은 돌려 떠올린 일을 다시 떠올렸어. 본드의 차 안에서 키 그 뭐시기 그걸 한 다음에 너무 무섭고 당황스러워서 도망오긴 했는데 간지럽다 했더니 자신의 앞이 살짝 부풀어 있었어. 급하게 나오느라 야상조차 가져 나오지 않아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앞을 가릴 외투도 없고 큐는 튜브 화장실에 틀어 박혀서 한참 심호흡해야 했어. 설상가상 야상이 없으니 지갑도 없었지. 큐는 집까지 걸어와야 했어. 걷는 내내 얼굴이 식질 않았어. 집에 들어왔을 때 다리는 끊어져라 아픈데 힘들다는 생각도 못 했어. 씻을 때까지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 큐는 그날 내내 자신의 바보 같음에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몰라. 물론 지금도 좀 그랬어. 아, 회사가기 싫다. 세상에서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연애경험이 전무한 큐에게 그 날의 일은 극복할 수 없는 충격이었어.



그나저나 본드는 왜 내게 키스했을까. 날 좋아하나? 이렇게 갑자기? 내가 그렇게 오래 좋아했는데 아무런 반응도 안 했잖아. 그런데 내가 왜 좋아? 큐가 멍하니 생각했어. 좋아하는 게 아니면 뭐지.. 우린 무슨 관계지? 하긴, 본드는 다리 달린 모든 것과 섹스한다는 소리가 있긴 했어. 큐는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어. 설마 본드가 나랑 섹스하려고 한 거야? 설마 말도 안 돼. 말도! 하지만 만졌잖아!



큐가 벌떡 일어나 (물론 큐의 기준이라 빠르진 않았음) 패브릭을 집어 던졌어. 이번엔 본드가 건들었던 온 몸이 근질근질하고 푸드득 떨렸어. 큐는 다시 웅크리고 끙끙거렸어. 그래, 좁은 차 안에서 내가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받아들였나봐! 게다가 난 조수석에 거의 누워 있었잖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인 게 틀림없어! 조수석에 누워서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본드에겐 그 뜻이었을 거야.. 나 쉬워보였을까? 다들 그러고 나면 하더라고.. 난 키스를 밀어내지도 않았어. 어떡해.. 이건 완벽한 섹스어필이야. 내가 이렇게 쉬운 애일 줄이야.. 큐는 야동으로 해결된 잘못된 성교육의 결과로 부들거렸어. 하지만 난 아닌데.. 난 본드와 그런 걸 하고 싶은 게.. 아닌.. 그럼 난 본드랑 뭘 하고 싶지? 생각이 생각을 물었어. 그러고 보면 본드를 보는 게 무작정 좋긴 했는데 딱히 뭘 해보고 싶다고 상상해 본 적은 없었어.



큐는 낑낑거리며 바닥으로 내려왔어. 바닥을 기며 소파 아래를 더듬었어. 소파가 끝나는 구석에 물컹한 체온과 포실포실한 털이 있었어. 손을 더듬어 억지로 앞발을 찾아낸 큐가 쭉 끌어 레이디 큐큐를 끌어안았어. 레이디 큐큐가 와아앙, 와아앙 하며 싫다고 발버둥 쳤어. 큐는 웅크린 채로 가슴 아래에 레이디 큐큐를 집어넣고 웅크렸어.



나는 진짜 본드랑 뭘 하고 싶지?



큐가 멍하니 생각했어. 바닥에 깔린 러그에 이마를 비볐어. 바닥에선 고양이 발에서 나는 특유의 꼬소한 냄새가 났어. 그건 그렇고 난 이제 어떡하지? 본드에게 난 뭐지? 큐가 낑낑거렸어.



큐는 처음으로 본드와 마카롱을 사러가는 모습이나, 물통과 바게트 빵을 나눠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했어. 혹은 고지서를 보며 본드, 이번엔 전기를 좀 많이 썼어요. 하고 말하는 자신을 떠올렸지. 그래? 어디 봐. 네 랩톱 때문 아니야? 하며 다가와 어깨를 붙이고 나란히 내려 보는 본드도 떠올랐는데.. 맙소사 이건 동거잖아! 하고 큐는 자신의 방탕함에 절망했어.



키스 한방에 큐는 세상에서 가장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











*











“저 당신 안 좋아해요.”



본드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어. 게다가 이거 꼭 꿈에서 본 것처럼 익숙했지. 본드는 무의식적으로 땀에 쩔은 엉덩이를 긁으며 찌푸렸어. 그래, 사실 꿈에서 본 게 아니라 얼마 전에 겪은 일이었어. 큐는 언제나처럼 차분한 얼굴로 입을 앙 다물고 있었어. 한심하다는 듯 사람을 쳐다보는 표정, 그래, 저 재수 없고 뻔뻔한 표정. 표정까지 똑같았어. 본드는 대체 삼일 간 결근하고 나타나서 저딴 말을 하는 큐를 이해할 수 없었어.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거든. 이놈의 쿼터마스터는 독대를 할 때마다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드는 이상한 재능이 있었어.




“이제는요.”




큐가 덧붙였어. 큐는 오늘도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싶었어. 덧붙인 말에 기분이 더 우울해졌지. 하고 싶었던 말은 그 날 제가 실수 한 것 같아요. 저는 본드와 그런 행위를 하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닌데 다르게 전달되었나 봐요. 저는 본드를 진지하게 좋아하고 있지만 그게 다에요. 본드가 제게 어떻게 해주길 바라고 있진 않아요. 그냥 전 본드를 혼자 보고 기뻐하는 게 더 익숙하고 여전히 그렇게 지내고 싶어요. 그러니까 그 날 키.. 그 뭐 여튼 그건 없었던 일로 해요. 였어. 이것도 약간 이상하긴 하지만 여튼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지. 하지만 트레이닝실에 박혀있던 본드를 소환하고 눈을 마주치는 순간 입은 자신의 제어를 벗어났어.



큐가 한숨을 쉬고 눈을 깜빡였어. 또 저 표정. 본드가 찌푸렸어. 왜, 대체 왜 항상 내 쪽이 바보라는 듯 구는 거지? 본드는 기분이 나빴어. 대체 자꾸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입을 막 때는데, 본드가 발견한 건 큐의 빨개진 귀와 떨리는 손이었어. 느리게 침을 삼키는 목덜미도 말이야. 본드는 피식 웃었어. 아, 그렇군. 자신이 모르던 쿼터마스터의 얼굴을 보게 된 모양이야. 큐의 개인 사무실이 아닌 큐브랜치 한 켠의 책상을 본 것과 같은 거였지.




“그래서, 더 할 말은 없어?”


“뭐.. 없어요.”




본드는 노래하는 듯 한 큐의 목소리를 즐겼어.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내리깐 시선이 퍽 자신 없어 보였어. 저 표정이 자신 없어 보이다니. 본드는 하고 싶은 말이 얼굴에 그대로 다 보인다고 생각했던 큐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봤어. 여전히 무표정하긴 했지만 전과 같이 보이진 않았어. 큐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며 눈을 깜빡거렸어. 그게 퍽 귀엽게 보였지. 본드는 싱글벙글 웃었어.




“알았어.”




본드는 큐의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들었어. 뭐냐는 듯 올려보는 큐와 눈을 마주치고 윙크했어. 씹어 먹고 싶다는 듯 이를 보이며 앙, 하고 깨무는 시늉을 했어. 큐는 당황했지만 워낙 긴장해서 반응이 없었어. 본드는 언젠가 처럼 가볍게 돌아섰어. 큐는 또 울고 싶어졌어. 




























9.








점심시간이 되기 전, 본드는 샐러드 도시락을 두 팩 샀어. 하나는 저염식 드레싱에 삶은 달걀과 닭가슴살 듬뿍, 하나는 시트러스 드레싱의 완전 채식 샐러드였어. 본드는 큐브랜치로 올라가 채식 샐러드를 큐에게 내밀었어. 폭발한 핫초코를 다 마시고 컵을 씻으러 가려던 큐는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어. 뭐냐는 물음이 명백한 표정에 본드는 같이 먹을 점심. 하고 스윗하게 웃었어. 큐는 본드의 표정이 황홀하고 자신을 보고 그렇게 웃는다는 사실이 더 황홀해서 뻣뻣하게 멈췄어. 본드는 싫은가? 하고 생각했지만 묻진 않았어.



큐는 샐러드를 양 손으로 받아들고 이게 내건가 본드가 날 위해 사온건가 한참 생각했어. 믿어지지 않았어. 어떻게, 본드가, 나에게, 샐러드, 점심을, 같이해. 너무 감격해서 생각까지 파들파들 떨며 뚝뚝 멈췄어. 감동 포인트가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감동받아야 할지 모르겠단 기분이었어. 본드는 큐가 반응을 보이길 기다렸지만 큐는 샐러드 팩만 보고 있었어. 나름 온 몸으로 감동받는 중이었지만 본드가 보기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 한참 기다려도 말이야.



결국 답답한 본드가 강요는 아니야. 하고 샐러드 팩을 다시 쥐었어. 큐가 아, 하고 아쉬운 소릴 냈어. 붙들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을 본드는 놓치지 않았어. 싫다고 말도 못 하는 큐는 손에 힘을 주고 샐러드를 아쉽게 내려 보고 있었지. 젠장, 귀여웠어. 본드는 이 귀엽다고 느낀 감정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서 주먹을 꽉 쥐었어. 밤일에는 도가 튼 본드였지만 그에 반해 연애는 그다지 능숙하지 못 했거든. 차라리 홀리고 꼬셔서 침대에 데려가는 데엔 이딴 어린 너드 따위 한 시간이면 될 것 같았지만 그 이상을 하려니 막막했어. 섹시해 보이는 게 아니라 잘 보이려고 하니 어려웠지. 게다가 사실 딱히 연애를 하고 싶다기 보다는.. 예뻐 해주고 싶고 좀 더 친밀해지고 싶다는 말이 맞을 것 같은 감정이라 더 어려웠어.




평소 같았으면 저녁에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데려갔겠지만 큐에겐 그러고 싶지 않았어. 지금까지 성적 대상에게 느끼던 감정과 달라서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느끼한 늙은이로 보이기 싫었거든. 동시에 큐와의 나이차가 떠올라 잠시 현타를 맞긴 했지만 그건 그거였어. 어쨌든 본드는 저 너드가 놀라거나 부담스럽지 않도록 신경써주고 싶었어. 꽤나 답지 않은 생각이었지.



아, 근데 왜 내가 이렇게까지 하지? 뭐 그날 하루 예쁘고 아랫도리 좀 반응하긴 했지만 내가 왜? 사실 본드는 샐러드를 사면서도 불만이었어. 하지만 신경써서 샐러드를 고르며 숨길 수 없이 지어지는 웃음 속에는 자신의 체온을 느끼며 안심하던 큐가 있었어.



아무튼 그렇게 저렇게 생각했고 그러다보니 맞은 상황이 이거였어. 굳이 채식 샐러드인 이유는 자신의 폭발하는 센스였어. 큐의 마른 몸이며 예민한 성격을 고려했을 때 채식을 좋아하는 게 분명했거든. 본드의 경험에 빗대 생각하건데, 보통 저렇게 마른 애들은 고기나 단걸 멀리하고 입 짧은 식성을 가지고 있었어. 입맛에 딱 맞는 식사에 큐가 기뻐할 걸 기대하며 본드는 조금 들떴어. 지금까지의 큐를 봤을 때 어떻게 제가 좋아하는 걸 아셨어요? 하고 발랄하게 반응할 것 같진 않았지만 아, 하고 기분 좋은 탄성 정도는 터트릴 거라 생각했어. 그걸로 충분할 것 같았지.



그리고 지금은 도시락을 다시 가져가려고 했을 때 아쉽다는 듯 터트린 목소리와 뺏기기 싫다는 듯 힘을 준 손이 있었어. 본드는 충분히 만족스러웠어.




“나갈까?”




본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앞장섰어. 먼저 돌아서서 에스코트 하던 습관대로 큐를 향해 한 쪽 팔을 살짝 내밀었어. 하지만 그런 건 당해본 적도 없고 해 본 적도 없는 큐는 그게 무슨 모션인지 몰랐어. 본드는 부드럽게 감겨 올 팔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큐는 대신 야상 소매에 팔을 끼웠어. 본드가 보기엔 야상을 들어서 가볍게 털고 느긋하게 옷을 입는 중이었지만 큐 딴에는 먼저 돌아선 본드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서두르는 거였지. 머쓱해진 본드가 어깨를 돌려 스트레칭 하고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렸어. 큐는 한 쪽 팔만 겨우 끼우고 따라가서 엘리베이터에서야 야상을 제대로 챙겨 입었어.



큐는 왜 엘리베이터를 타는 걸까.. 멍하게 생각했어. 도시락을 사왔으면 개인 사무실에서 먹으면 될 텐데. 사실 본드가 도시락을 사왔을 땐 그러자는 뜻인 줄 알았어. 걷는 거든 움직이는 건 다 싫어하는 큐는 사실 나가기 싫었어. 그런데 본드가 먼저 나가니까 뭐.. 따를 수밖에. 본드에게 거부의 말을 하는 게 더 싫었거든.











본드는 주변의 공원으로 큐를 데리고 갔어. 역시, 도시락이라면 뻥 뚫린 공원이지. 라고 생각했지만 공원은 사람으로 가득 차있었고 런던답게 우중충했어. 화창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본드는 낭패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그래도 비가 안 오니 괜찮겠다고 곧 생각을 고쳤어. 본드는 손수건을 꺼내 벤치에 깔았어. 엉덩이가 차갑지 않도록 한 배려였지. 위에 앉으라는 뜻을 담아 턱짓하자 샐러드팩을 양 손으로 들고 쫑쫑 따라온 큐는 손수건 옆에 다리를 모으고 얌전히 앉았어.



본드의 깔아놓은 손수건이 머슥해졌어. 큐는 본드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뭔가를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뭘 잘못했는지는 알아차리지 못 했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샐러드 도시락을 손수건 위에 올렸어. 이게 맞나? 큐는 다시 눈치를 봤어. 본드는 얘가 대체? 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중이었어. 물론 큐는 눈치를 보긴 했지만 눈치를 채진 못 해서 본드의 멍한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어. 제가 뭔가 잘못했나요? 라고 큐는 묻고 싶었고 본드는 너 앉으라고 깔아놓은 거에 도시락은 왜 올려? 하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상, 둘은 입을 다물었어.



큐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어. 본드도 한 손에 샐러드 도시락과 포크를 들고 멍하니 앞을 봤어. 상대가 뭔가를 하길 서로 기다렸어.



먼저 움직인 건 본드였어. 나참, 내가 뭘 하는 거야, 하며 본드가 고개를 저었어. 자신이 큐를 얼마간 오해한다는 걸 알긴 하겠는데 여전히 큐를 이해할 순 없었어. 본드는 한숨을 쉬며 도시락을 뜯었어. 대체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얜 왜 이러고 있나.. 이것저것 생각이 많았는데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어. 본드는 생각을 말자 싶어서 드레싱을 뿌려 포크로 퍽퍽 찍기 시작했어. 배가 고팠던 큐도 얼른 도시락을 뜯었어.



의식하기 전에 집에서 하던 습관이 나왔어. 큐는 양 발을 밴치에 올리고 웅크려서는 무릎 위에 도시락 팩을 올렸어. 아침이나 저녁으로 뮤즐리를 먹을 때 하는 행동이었지. 반응 없는 본드를 기다리다 아사할 지경이던 큐는 드레싱을 마구 뿌리다가 멈칫했어. 이 신 향은 뭐지? 샐러드는 모름지기 무겁고 단 드레싱이랑 듬뿍 들어간 고기 아니면 새우로 완성하는 거 아닌가? 기름기라곤 없는 드레싱에 이 채소더미는 대체 뭐지? 큐는 고기를 찾아 샐러드를 뒤적였지만 있는 거라곤 로메인상추나 겨자잎이나 양상추나.. 있으나마나한 애들뿐이었어. 큐는 본드를 물끄러미 봤어. 삶은 달걀의 노른자를 솜씨 좋게 빼서 뚜껑에 쌓아놓던 본드가 시선을 느끼고 큐를 돌아봤어. 큐는 갑자기 마주친 눈에 당황해 고개를 숙였어. 어색해 죽겠는데 티낼 순 없으니 아무렇지 않은 척 조심조심 로메인상추와 자몽 등을 빼먹었어. 양상추는 비려서 싫어, 겨자잎은 코가 매워, 왜 과일은 하필 자몽이야? 쓴 것 밖에 없잖아. 고기.. 단거.. 딸기.. 하는 게 큐의 속마음이었어.



반면에 조심스러운 큐의 포크질을 보는 본드는 휘통사고를 당한 느낌에 움찔했어. 가슴팍이라도 부여잡고 싶었어. 저런 너드같이 웅크리고 느릿하게 포크질 하는 게 왜? 왜! 귀엽지? 귀엽지! 귀여워! 본드는 식사도 잊고 침이 고이는 입을 달싹이며 넋을 놨어.



큐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본드가 쌓아놓은 계란 노른자를 빤히 봤어. 고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의 샐러드에 비해선 제일 고기 같은 거였어. 고기.. 고기가 먹고 싶어. 큐는 의식 없이 본드의 계란 노른자로 손을 뻗었어. 포크로 찍어서 입에 넣자 풀 아닌 것의 퍽퍽함에 약간의 충족감이 들었어. 큐는 그렇게 하나 둘 계란 노른자를 집어 먹기 시작했어.



본드가 빼놓은 걸 다 먹어치운 후에야 자신의 샐러드를 뒤적거리는데 도시락 끝머리에 계란 노른자가 톡 떨어졌어. 놀란 큐가 고개를 들어 본드를 쳐다봤어. 본드가 열심히 노른자를 빼서 큐의 도시락에 올려주고는 부드럽게 웃었어. 큐는 홀리는 것 같은 본드의 웃음에 고기가 없는 샐러드 도시락마저 행복해졌어. 얼마간 눈을 떼지 못하고 마주하다가 자신이 너무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고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였어.



본드는 숙인 큐의 뒤통수에 가슴이 간질간질해 졌어. 북실북실한게 검은색 양 같기도 하고 푸들이나 털이 긴 고양이 같기도 하고.. 아니 알파카 같기도 하고.. 어쨌든 간에 털 긴 동물 같았어. 동물을 볼 때엔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 따위 한 적이 없는데 큐의 뒤통수는 살면서 처음으로 건들어 보고 싶었어. 결국 못 참은 본드가 큐의 뒤통수를 싹싹 쓰다듬었어.



그 손길에 큐는 귀가 달아오르고 부끄러워서 몸이 벨벨 꼬이는 기분이었어. 발끝에 힘이 들어가 동그랗게 말렸어. 큐는 혹시나 어색해하거나 움직이면 거부하는 걸로 생각한 본드가 손을 뗄까싶어서 고개는 들지도 못하고 눈만 깜빡거리며 샐러드를 먹었어. 어색하지 않은 척 하려 열심히 먹다보니 그 싫어하는 양상추도 먹고 버섯도 먹었지. 본의 아니게 도시락을 깔끔하게 비웠고 본드는 자신의 나이스 초이스에 뿌듯했어.




둘은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딱히 말이 없었어. 첫 데이트(둘 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겸 식사는 그렇게 싱겁게 끝났어. 그날 큐는 큐브랜치로 돌아가 당분을 채우기 위해 핫초코 다섯 봉지를 뜯어 먹었고 집에 가는 길엔 이례적으로 마트에 들러 고기를 종류별로 사다가 구워 먹었어. 본드는 운동하는 내내 생각 외로 부드럽고 동그랗던 큐의 뒤통수와 웅크린 몸을 생각하며 가슴팍을 퍽퍽 쳐댔어. 세상에 계란 노른자를 좋아하다니 딱 좋다 생각하면서.











*











큐는 고기라곤 없는 샐러드팩을 받을 때마다 조금 울쩍해졌어. 오늘도 고기가 없구나.. 대체 왜? 사람의 주식은 고기랑 당분 아닌가? 더블오세븐이 날 괴롭히나? 호의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봐. 큐는 본드의 진심을 의심하기 시작했지만 함께하는 점심을 거부하진 않았어. 의미가 뭐든 뭘 하든 본드랑 있는 게 마냥 좋았거든.






오늘도 본드는 계란 노른자를 큐의 채식 샐러드에 올려줬어. 큐는 곧 이빨이 노란색이 되거나 입에서 닭똥 냄새가 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익숙하게 받아먹었어. 양상추에 싸서 시트러스 드래싱에 찍어먹으면 나쁘지 않았어. 워낙 먹다보니 괜찮게 먹는 법을 알아낸 거지. 게다가 오늘 샐러드의 과일은 큐가 좋아하는 거였어. 큐는 이제 꽤 익숙해진 채식 샐러드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았어.



나름 맛있게 먹고 돌아가는데 건물로 들어서기 전, 본드가 큐의 머리를 쓰다듬었어. 큐는 늘 그렇듯 눈을 살짝 감으며 손길을 즐겼어. 첫날 뒤통수를 쓰다듬은 걸 시작으로 본드는 도시락을 다 먹고 나면 잠시간 큐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어. 본드 입장에선 손대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 못 하고 쓰다듬는 건데 큐가 거부하질 않으니 매일 이어지고 있었어. 본드는 왜 사람들이 작은 동물을 보고 귀엽다며 끌어안고 쓰다듬는지 요즘에서야 이해할 수 있었어. 본드 입장은 그랬고 큐 입장에선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온 터라 본드의 이런 어른스러운 스킨쉽이 달콤했어. 손길이 닿는 다는 것도 좋고, 그게 머리라서 더 좋고.. 간질간질한 손길을 느낄 때마다 큐는 이대로 잠들고 싶다고 생각했어.



잠들 때까지 본드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은 무럭무럭 커졌어. 매일 하는 상상이다 보니 이제는 꽤 구체적이었어. 큐가 하는 상상은 이랬어. 날이 좋은 날에 창을 모두 열어놓고 푹신한 소파에 본드가 책을 보며 앉아있어. 그러면 큐가 레이디 디디나 큐큐 둘 중 하나를 안고 다가간 자신이 본드 옆에 웅크려 앉지. 옆자리의 체중을 느낀 본드가 스윗하게 웃으며 책을 덮고 큐 자신의 머리를 만지작거려. 그러면서 살짝 당기는 힘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본드의 허벅지를 베고 눕게 되는 거지. 그럼 본드는 더 자연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줘. 살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에 눈이 절로 내려가.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랑 손길이랑 고양이의 따듯한 체온.. 얼마나 좋을까. 그야말로 천국이겠지. 큐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서 눈에 물기가 핑 돌았어.



하지만 그래봤자 긴 시간은 아니었어. 얼마안가 미쳤어, 그런 상상을! 하고 자신을 나무랐어. 본드 옆에서 누워 있겠다고?! 그것도 허, 허, 허, 허, 허벅, 허, 허벅, 허벅지, 허벅지를, 뭐, 뭐? 허벅지를, 어? 그걸, 어? 베고?! 하고 스스로의 방탕함을 질책하는 걸로 끝을 맺었거든. 하지만 그래도 한 번 쯤은 그런 달콤한 방탕함에 빠져보고 싶다고 바랐어.




“큐.”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큐가 흠칫했어. 자신의 방탕한 상상을 본드가 눈치 챘을까 싶어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어. 본드는 고작 머리 좀 만졌을 뿐인데 얼굴을 붉히는 큐가 귀여웠어. 놀리고 싶기도 하고 빨개진 얼굴과 입술이 딱 맛있게 익은 과일 같아서 입에 넣고 쪽쪽 빨고 싶었어. 그 마음들을 담아서 쪽, 하고 허공에 입 맞추는 시늉을 했어. 말 할 것도 없이 큐는 귀 끝까지 달아올랐지. 본드가 이럴 때마다 왜 온 몸에 힘이 들어가고 발이 동그랗게 말려 들어가는지 모르겠어. 큐가 곤란하게 끙끙거리자 본드가 웃었어.




“저녁도 같이 할까?”




본드는 이정도 점심 챙겨 먹었으면 됐다, 하는 마음에 큐에게 정식으로 데이트를 신청했어. 본드 입장에선 충분히 천천히 다가간 거였어. 그 노력에 답하듯 최근 들어서는 큐와 많이 친근해 진 것 같았어. 딱히 대화가 늘어났다거나 하진 않지만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어. 여전히 무표정하고 뚱해 보일 때가 많았지만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마다 눈을 살짝 감고 부드러운 한숨을 뱉는 거나, 샐러드에 들어간 과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작게 왜.. 하고 중얼거리는 걸 보면 느낄 수 있었어. 샐러드에 딸기가 들어가 있을 땐 살짝 웃기도 했어.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 본드는 놓치지 않았지. 그게 뭐가 가까워진 거냐고 해봤자 전의 큐를 생각하면 감정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많이 편해졌다는 증거였어. 큐 본인은 자신이 툴툴거리거나 웃는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지만. 본드가 따라서 웃거나 하면 왜요? 하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거든.



어쨌든 본드가 한 건 데이트 신청이었어. 이제 우리 충분히 간 봤으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맛볼까? 하는 뜻이었지. 물론 이 너드가 알아들을지는 미지수였어. 뭐, 진짜 저녁만 먹겠다고 따라 나와도 그걸로 충분하긴 했어. 언제부터 이렇게 기대치가 낮았나 생각하면 본드는 스스로의 화려한 밤 문화를 돌아보게 됐지만 어쩌겠어? 언젠가부터 요 꼽실꼽실한 머리에 손이 가고 매일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신선한 샐러드 도시락을 찾아다니게 됐는데. 딸기랑 수박은 좋아하고 자몽이랑 레몬, 오렌지 종류는 싫어하는 것도 알게 됐고 말이야.




“네?”


“강요는 아니야.”




큐가 놀라서 물었지만 본드는 일부러 한발 뗐어. 말을 듣는 순간 오늘 저녁까지 일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계산하고 있던 큐는 본드의 물러서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어. 본드가 아니면 말고, 하는 말이 섭섭했는지 눈동자가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어. 눈치 챈 본드는 귀여워서 좀 더 놀리고 싶기도 했고 얼른 안심시켜주고 싶기도 했어.



본드는 두 번째 ‘저 당신 안 좋아해요.’를 듣는 순간부터 큐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어. 덕분에 큐와 어떻게, 는 고민했지만 큐가 자신을 거부할 거란 생각은 하질 않았어. 이번에도 마찬가지어서 여유롭게 큐의 반응을 살폈어. 반면에 전혀 그런 눈치라곤 없는 큐는 안절부절 못하며 (물론 겉으로 보기엔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음) 할 말을 찾았어.






본드랑 저녁 먹고 싶은데! 나 그러겠다고 하려고 했는데! 내가 너무 늦었나? 강요는 아니라니.. 내가 싫어하는 줄 알았나? 아닌데? 전혀 아닌데! 어떡하지? 내가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을까? 지금 내가 저도 먹고 싶은데요, 라고 말하면 이상한가? 그냥 해본 말이어서 곧바로 강요는 아니라고 했나? 예의였을까? 나 지금 먹자고 하면 눈치 없는 놈 되는 거 아니야? 나 먹고 싶은데 먹고 싶다고 해도 돼? 저녁도 먹고 싶어, 풀밖에 샐러드라도 완전 괜찮아. 아니 사실 고기가 더 좋긴 한데..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닌데.. 아.. 저녁 먹을래. 본드랑 저녁 먹을래.






지금 큐의 머릿속은 혼란이었어. 본드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젖히며 큐를 관찰했어. 귀여워 죽을 것 같았거든. 당장이라도 머리를 쓰다듬고 뽀뽀를 퍼 부으며 나랑 저녁 먹자, 큐티, 너 어차피 그러고 싶잖아. 하고 부둥거리고 싶었지만 숨기기 위해 눈썹을 모아 찡그렸어. 머릿속에 생각으로 전쟁이 터진 큐는 그걸 살필 겨를이 없었어. 단지 본드가 찡그려, 내가 너무 오래 생각하나봐! 하는 폭탄이 머릿속에서 하나 더 터졌을 뿐이지.




“퇴근 때 보지.”




결국은 본드가 져줬어. 큐의 머리를 푸르르 털어주고는 먼저 돌아섰어. 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본드의 말을 헤아리다가 얼른 쫓아갔어.




“먹고 싶어요.”




큐가 본드의 팔에 두드리며 말했어. 자신이 본드의 몸에 손을 댄다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긴장돼서 얼른 떼버렸지만.




“그, 저녁.. 저녁이요. 같이 먹을 사람도 없고..”




큐는 꼭 고백하는 사람 같았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귀가 얼마나 빨갛게 달아올랐던지.. 본드는 웃어버렸어. 이러다가 또 저녁에 와서는 저 당신이랑 저녁 안 먹을래요.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고 우스갯소리로 생각했어.




“그러니까 퇴근하고 보자.”




이러다 애 울리겠네, 싶었어. 본드가 큐의 어깨를 양 손으로 잡고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어. 고개를 끄덕거린 큐가 본드를 지나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여러 번 눌렀어. 큐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본드가 피식 웃으며 일부러 계단으로 향했어. 끝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큐를 잡아다가 온 몸을 깨물어주고 싶었어. 그 말이 뭐라고 쟨.. 혀를 차는데 웃음이 났어.



계단을 오르던 본드는 한 층을 지났을 때쯤엔 콧노래를 불렀고 현장요원들이 사용하는 층에 도착했을 때엔 큐가 만졌던 자신의 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큐가 먼저 자신에게 손을 뻗은 건 처음인 것 같았어. 조금 떨리는 손길이었나? 아닌가? 곱씹으려니 좀 더 자세히 기억하지 못 하는 게 아쉬웠어. 아, 이게 뭐라고 내가.. 큐를 따라 덩달아 소년이 되어가는 것 같았어. 본드는 싫지 않은 느낌에 푸슬푸슬 웃으며 고개를 저었어.











*











본드는 퇴근시간도 되기 전에 야상을 챙겨 입고 현장요원 섹션을 기웃거리는 큐 때문에 웃음이 터졌어. 세상에, 쿼터마스터의 조기 퇴근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어. 그게 귀엽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좋은가, 하는 생각에 으쓱하기도 했어. 할 일도 없는데 일부러 느긋하게 움직이던 본드는 이러다 울리겠단 생각에 얼른 돌아섰어.



모서리에 숨어서 초조하게 본드의 움직임을 좇던 큐는 본드가 돌아서자 자신도 모르게 벽에 등을 딱 붙이고 숨었어. 물론 숨겨지진 않았지만. 본드가 걸어오는 걸음을 따라 가슴이 쿵쾅쿵쾅 품위 없게 뛰었어. 점심도 매번 같이 먹었는데 저녁 한 번 더 같이 먹는다고 뭐가 이렇게 설레는지 모르겠어. 이해가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녁은 좀 더 프라이빗한 무언가잖아.. 하는 생각에 설렘이 주체가 안 됐어.




“큐-”




어느새 가깝게 다가온 본드가 큐를 부드럽게 불렀어. 다른 쪽 모서리 벽에 팔을 대고 삐딱하게 서 있는 게.. 너무 멋있어서 큐는 울고 싶었어. 큐의 일렁거리는 눈을 확인한 본드가 웃으며 한 쪽 팔을 내밀었어. 여전히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큐는 눈만 깜빡이며 팔을 내려 봤어.




“이렇게.”




본드가 큐의 손을 잡아 자신의 팔을 감싸게 했어. 안쪽 팔꿈치를 손으로 감게 만들어 놓고는 잡으라는 듯 꾹 눌렀어. 큐의 손이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어. 이렇게 하고 있는 거야, 하고 알려주듯 손을 토닥인 본드가 큐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 치고 걸음을 옮겼어. 큐는 손이 굳어서 다리까지 굳었는지 뻣뻣하게 따라왔어. 본드는 숨길 수가 없어서 소리 내 웃었어.




“전 여자가 아닌데요, 더블오세븐.”




이게 남성이 여성을 에스코트 할 때 하는 행동이라는 걸, 자신이 여성처럼 본드에게 에스코트 받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큐가 중얼거렸어. 물론 입을 떼는 순간 후회하긴 했지. 언제나 그렇듯 말이야. 자신의 입에서 나간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큐는 끙.. 하고 앓았어. 스스로가 한심해서 한심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어. 본드도 그 표정을 봤지만 이젠 별달리 생각하지 않았어. 어느 때처럼 왜 날 바보 같다는 표정으로 보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그냥 또 저 표정이네, 하면서 조금 귀여웠을 뿐이야.




“놀리는..”


“쉬..”




수습하고 싶어서 한 말이지만 수습이 되지 않을 큐의 말을 본드가 잘랐어. 큐는 말이 잘려서 조금 당황했지만 본드가 말을 잘라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둘은 그렇게 조금은 어색하게 붙어서 지하 주차장으로 갔어. 레스토랑에서도 여전히 어색했지. 하지만 파킹을 맞기고 팔을 내민 본드의 팔에 큐는 스스로 손을 얹었어. 얼굴은 빨갰지만.




그날 저녁, 어색하게 앉은 큐에게 본드는 마른 여자들이 좋아할법한 (여기 데리고 왔던 여자들이 대부분 좋아하던) 양이 적고 깔끔한 메뉴를 큐에게 추천했어. 큐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했지만 결국은 본성에 따라 고기고기한 메뉴를 주문해 싹싹 비웠어. 샐러드만 있을 땐 거절 못 하고 먹었지만 고기가 있는데 어떻게 안 먹을 수가 있겠어? 디저트도 단거, 보기만 해도 미칠 듯 단걸 주문해서 초코가루 한 톨 안 남기고 맛있게 먹었어. 본드는 예상 못한 큐의 메뉴 선정과 본 중에 가장 맛있게 먹는 모습에 난 진짜 쟬 모르겠다며 연신 고개를 저었어. 그러면서도 웃고 있었는데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건 초코가 묻은 포크를 아쉽다는 듯 쪽 빤 큐가 왜 웃어요? 하고 물었을 때에야 알아차릴 수 있었어.

























10.








큐는 그동안 샐러드로 때운 점심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열심히 먹었어. 본드가 소고기 스테이크 한 조각과 와인 한잔을 먹는 동안 큐는 소고기와 양고기, 닭고기가 골고루 나오는 로스트요릴 배터지도록 먹고, 디저트도 두 개나 먹었어. 제 몫의 끈적끈적한 초코 디저트를 닥닥 긁어먹고 나서도 입맛을 다시는 걸 보고 본드가 프랑스식 디저트를 하나 더 추가해 줬거든. 사실 큐는 입 안에 들러붙은 초코향이 좋아서 입맛을 다신 거였지만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어. 큐는 감사하게 먹었어.



그렇게 디저트 두 개를 쓸어 넣고 나자 핫초코 가루로는 채워지지 않던 당분이 이제야 채워지는 기분이었어. 큐는 달짝찌근함이 피처럼 온 몸에 흐르는 느낌에 부드러운 한숨을 뱉었어. 채식 샐러드를 먹고 돌아가서 저녁에 양껏 고기를 먹은 것도 한두번이지, 귀찮음에 다시 뮤즐리 식사를 이어가고 있었거든. 과히 오랜만의 포식이었어. 큐는 다시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늘어졌어. 허리를 세우고 있을 수가 없어서였어. 먹을 땐 몰랐는데 먹고 나니 배가 가득 차서 무거웠어. 위에 음식물이 가득 차서 식도는 물론이고 척추까지 누르는 기분이었지. 큐는 숨을 몰아쉬며 판판한 배를 문질렀어. 평소엔 납작하게 붙은 배가 한계까지 밀어 넣은 만큼 조금 동그래진 것 같았어.



본드는 꼿꼿하게 앉아있던 큐가 포크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몸을 릴랙스 시키는 모습에 웃었어. 흘러내릴 듯 의자에 기댄 모습은 처음 봤어. 본드에게 익숙한 모습은 허리를 한껏 펴고 서있는 모습이었지. 아, 이제는 무릎 위에 도시락을 올리고고 웅크린 모습도 익숙했어.



어쨌든 저녁식사를 권하길 잘했어. 다행히 레스토랑 음식도 입맛에 맞는 것 같았고. 이건 물어볼 필요도 없었어. 샐러드도 깨작거리는 애가 무려 고기를 죽자고 먹었으니까. 먹는 게 보기 좋은 마음 반, 얼마나 먹는지 구경하는 마음 반으로 시켜준 디저트까지 닥닥 긁어 먹었지. 본드는 큐가 저 어울리지 않는 마른 몸으로 자신의 세배는 먹어 치웠을 거라고 생각했어. 배가 고팠나, 그렇게 맛있었나,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먹어줘서 본드의 기분이 좋았어.



배부르면 정신까지 통통하니 동그래지는 모양이야. 큐는 가득찬 배를 수습하지도 않고 냅킨으로 손장난을 하고 있었어. 처음에는 끝만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종이배를 접는 듯 이리저리 접어대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어설펐어. 큐는 그 우글우글한 냅킨배를 보며 여러 번 눈을 깜빡거렸어. 마음에 안 드나 보군, 본드가 내뱉지는 않고 속으로 생각했어. 저러다 더 마음에 안 들면 한숨을 짧게 뱉겠지. 언젠가는 저게 상대를 한심해 하는 표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어. 큐는 그냥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였어. 본드는 큐의 표정을 읽어낸 자신이 대견하면서도 웃겨서 소리 내 웃었어. 큐가 본드의 웃음소리에 왜 그러냐는 듯 쳐다봤어. 입술을 조금 벌리고 있을 뿐인데 본드는 그 표정에서 꽤 많은 궁금증을 읽었어. 아무것도 아니라고 본드가 손을 내 저었어. 나는 그냥 와인이나 마신다는 듯 잔을 들자 큐가 다시 널부러져서는 냅킨을 구겼어. 본드는 큐의 풀린 모습이 싫지 않았어. 마시지도 않은 잔을 내려놓은 본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큐를 구경했어. 큐는 이제 제 배를 부드럽게 쓸었다가 통통 두드리고 있었는데 긴장감이라곤 없었어. 평소에도 딱히 긴장을 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뭐랄까.. 그 비슷한 딱딱한 부분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도 없었어. 눈치를 자주 살피는 편이기도 했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없이 편했지.




“뭘 좀 더 시켜줄까?”


“아니요. 더 먹으면 몸이 터질거에요.”




큐가 투덜거렸어. 농담이었는데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퉁명스러워서 큐는 입술을 앙 다물었어. 본드는 그건 별로 상관없는 듯했어. 단지 별거 아닌 농담에 소리 내 웃었어. 큐가 눈을 동그랗게 떴어. 본드가 왜 웃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웃는 모습이 좋았어. 본드의 웃음에 집중한 큐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따라 웃었어. 큐가 손장난 하던 냅킨을 다시 얌전히 무릎에 올리고 몸을 일으켰어. 본드와 더 대화하고 싶다는 모션이기도 했고, 혹시 너무 무례해 보이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뒤늦게 든 탓이기도 했어.




“아..”




큐가 짧게 신음했어. 다른 사람이 듣기엔 너무 작은 소리였지만. 속이 울렁거렸어. 본드 쪽으로 몸을 숙인 순간, 한계까지 밀어 넣은 음식이 올라올 것 같았어. 갑자기 들쑥거리는 속에 놀랐어. 큐는 알았어, 빨리 움직이지 않을게. 하는 마음으로 몸을 얌전히 다시 의자에 기댔어. 그러거나 말거나, 매력적인 웃음을 마저 웃은 본드가 눈을 마주쳐왔어. 큐는 침을 꼴깍 삼키며 본드를 봤어. 이 포즈가 건방져 보이면 절대 안 되는데.. 나 그런 거 아닌데.. 하면서도 본드의 얼굴에 홀려서 아무것도 못 했어.




“그렇게 비과학적인 말도 하나?”


“과학이요? 전 딱히 과학적인 거에 목매는 타입은 아닌데요. 나열이 오히려 그렇죠. 전 해커잖아요.”




아, 숨쉬기 힘들어. 큐가 배부름에 쌕쌕거리며 혼잣말을 했어. 본드에게 한 말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간 거였어. 내 입을 내가 컨트롤 못 하는 이거 꼭 언젠가 같은데.. 하고 큐가 생각하고 있을 때, 본드가 테이블에 몸을 기대며 다가왔어. 큐가 뒤로 늘어진 만큼 본드가 당겨 앉은 거였지. 너와 더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모션이기도 하고, 네 이야기를 내가 경청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포즈기도 했어. 뭣보다도 이렇게 다가가서 눈과 귀를 집중해 주면 상대가 설렌다는 걸 본드는 매우 잘 알고 있었어. 물론 큐는 본드의 모션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 그냥 아, 왠지 본드가 저러고 있는 거 좀 설레. 근데 너무 배불러. 하고 말았지.



그건그거고, 본드는 자신을 해커라고 칭하는 큐의 말이 의외라 눈썹을 모았어. 고개도 절로 갸웃했어.




"넌 쿼터마스터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과학보단 아이티에 가깝잖.. 가까워요. 기계를 만들긴 하는데 제가 하는 건 주로 계산이고.. 아, 그래요. 음. 아이티랑 과학도 따지고 보면 꽤 차이가 있어요, 더블오세븐. 당신 또래에서 헷갈리는 걸 이해하긴 하지만 음, 아.. 뭐.. 아니에요. 그냥, 그냥.. 어쨌든 해요. 그런 말."




길게 설명할 뻔 한 큐가 말을 멈추고 손사래를 쳤어. 하마타면 혼자 신나서 떠들 뻔 했어. 나름 본드의 지식에 맞춰 설명할 테지만 어차피 못 알아듣고 절대로 재미없을 걸 알았어. 하는 자신은 재밌겠지만 말이야. 자신만 재밌는 이야기를 본드 앞에서 길게 떠들고 싶지 않았어. 큐는 자신이 즐기는 일이 보통 사람들에겐 따분한 이야기일 뿐이라는 걸 이미 여러 경험으로 알고 있었어. 오히려 너무 잘 알아서 스스로도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였지. 또 실수 할 뻔했다는 생각에 큐는 조금 시무룩해졌어.



반면에 전 같으면 저게 설명을 하려다가 이상하게 끊네? 내가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나? 사람 바보 취급을 해도 꼭.. 하고 생각했을 본드는 이젠 그것 따위 생각하지 않고 있었어. 단지 잘못 전달된 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 쿼터마스터라는 지위가 있는데도 스스로 해커라고 칭하는 것에 놀라서 넌 쿼터마스터잖아, 라고 한 거였거든. 큐가 하다 만 말로 유추하건데 잘못 전달된 게 분명했어. 하지만 뭐.. 다시 설명할 방법도 모르겠고 설명하기도 뭣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어.



그나저나 해커라는 호칭은 본드에겐 소소한 충격이었어. 파격적일 정도로 털털하다고 해야 하나 그만큼 권력욕이 없는 건가 헷갈렸어. 어쨌건 자만보단 겸손이 귀여운 법이었어. 볼수록 의외라는 생각에 본드는 큐를 지긋이 봤어. 보면 볼수록 귀여운 면이 자꾸 나온단 말이야? 이러다간 나이프 잡는 것도 귀여워하게 생겼어.



본드의 표정은 큐가 봤다면 얼굴을 붉혔을 표정이었지만 지금 큐는 그럴 정신이 없었어. 부른 배를 어쩔 줄 모르고 끙끙거리다가 밀려 올라오는 걸 내리기 위해 연거푸 물을 마시는 중이었거든. (물론 모든 행위는 무표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 덕분에 배가 더 불러졌고 그럼 더 올라올 것 같아서 또 물을 마시는 무한 지옥을 경험하는 중이었어. 물마시면 물배가 더 찬다는 건 당연히 알지만 안마시면 당장 넘어오겠는 걸 어떡해? 그러게 미쳤지 배가 찢어지도록 먹어대다니. 미쳤어. 진짜 미련해. 본드가 보든 말을 걸든 큐는 속을 다스리느라 바빴어.




"큐."




본드가 부드럽게 불렀어. 큐는 물을 마시느라 답이 없었지. 그러거나 말거나. 본드는 답지 않게 테이블보를 검지로 투닥이며 말을 멈췄어. 시선은 큐가 아닌 자신의 손끝에 쏠려 있었어. 본드는 큐가 연거푸 물을 마시는 이유를 긴장이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렇다면 곧 자신이 할 말을 기다린다는 뜻이겠지. 본드는 말을 고르고 골라서 최대한 부담스럽지 않고 느끼하지 않게 큐에게 건넸어.




"내일도 같이 저녁 할까?"


"내일이요?"


"가능하면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말이야. 내가 영국에 없거나 네 큐브렌치가 폭발할 정도로 바쁘지만 않다면."


"그.. 요즘은 보안망 업데이트 말고는.. 괜찮으니.. 아, 떠블오세븐, 실례.. 잠깐.. 잠깐 실례할게요."




결국 큐는 양해를 구하고 벌떡 일어났어. 과식으로 속이 안 좋다니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야? 자책했지만 그보다 먼저 화장실에 다녀와야 했어. 곧 올라올 것 같았거든. 큐가 입을 막고 화장실로 사라진 후, 남겨진 본드는 뭐.. 머쓱하긴 했지만 그냥 웃었어. 차인건가 뭔가.. 좋긴 한데 하여간 모르겠어. 쟨.






큐는 비실거리며 화장실에서 나왔어. 다행히 진짜 토하지는 않았어. 그냥 계속 올라올 듯 속이 안 좋을 뿐이야. 화장실에서 허리를 숙이고 멍하니 있어봤는데 그냥 그게 다였어. 큐는 소리 내 웩웩거리지 않은 걸 그나마 위안으로 삼았어. 체한건가 싶기도 한데 올라오진 않는 걸 보면 진짜 그냥 너무 갑자기 많이 먹은 모양이었어. 양도 양인데 풀이랑 뮤즐리만 먹다가 고기였으니.. 위도 어색했겠지. 큐는 자신의 속을 이해하고 네 탓이 아니라고 위로하듯 자신의 배를 토닥였어.




"미안해요. 더블오세븐."




큐는 자리에 앉아 어색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렸어. 말하는 걸 끊고 화장실에 가질 않나 그 이유가 과식이질 않나..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어. 스스로가 한심해서 큐는 조금 울고 싶었어. 결국 오늘도 본드 앞에서 실수를 했어. 말실수 할 뻔 한 걸 본드가 한 번 끊어주고, 자신이 한 번 끊고. 두 번의 위기를 잘 넘겼는데 결국은 했어. 큐는 말이 아니면 몸으로라도 실수하는구나 싶은 생각에 울적했어.



본드는 괜찮다고 말해줬지만 큐는 괜찮지 않았어. 대번에 시무룩해진 큐는 더 이상 부끄럽기 전에 도망가고 싶었어. 이제 가요, 더블오세븐. 하고 큐가 한숨같이 말했어. 큐는 랩톱 가방에서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곤 제 몫의 음식 값과 팁을 머리로 계산했어.




“큐.”


“네?”


“내가 사는 거야.”




본드가 당연하다는 듯 큐를 제지하며 말했어.




“왜요?”




큐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고 본드는 의외의 질문에 눈을 가늘게 떴어. 그러게, 왤까. 그래 쟤가 여자도 아니고 내가 일방적으로 꼬시고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내가 살 필요는 없긴 하군, 하는 현타가 약간 왔지만 그건 그거고, 본드는 것보다 큐가 다른 걸 유추해내길 바랐어. 기대하는 표정으로 본드는 큐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큐는 입술을 살짝 옆으로 당겼다 놓았을 뿐, 별 반응이 없었어. 큐는 여러 생각을 해봤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어. 그래서 본드가 자신의 물음에 답하길 조금 더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어.




“그럼 다음엔 제가.. 아..”




큐가 생각났다는 듯 본드를 봤어. 그거 아닌데, 하고 생각하던 본드는 끝의 아, 소리에 들떴어. 드디어, 설마? 기대됐어.



큐는 화장실에 가기 전에 본드가 다음날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는 걸 기억해냈어.




“내일.. 저녁..”




내일 저녁을 같이.. 큐의 얼굴이 서서히 빨갛게 달아올랐어. 본드는 옳지옳지, 하는 마음에 엉덩이라도 토닥여 주고 싶었어. 큐는 입술을 꼭꼭 씹어대고 있었어.




“점심은요?”




큐가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어. 혹시나 내일 저녁이 점심 대신 일까봐 걱정됐거든. 이미 점심시간은 본드랑 함께하는 시간인데 내일 하루라도 거르긴 싫었어. 큐는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점심 같이 먹고 싶어. 하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조르진 못했어.



본드는 그거 아니야. 하고 정정해 주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어. 그냥 고개를 저으며 웃었어. 하여간, 모르겠어, 쟨 진짜. 그래도 점심은 같이 못 먹는 거냐고 아쉬워하는 것 같으니까 기분이 나쁘진 않았어. 기대치가 현저히 떨어져 있는 자신의 처지는 불쌍했고 말이야.




“큐.”


“네?”




본드가 테이블 위로 팔꿈치를 대고 큐에게 손바닥을 보였어. 살살 흔들며 뻗은 게 뭔가를 달라는 것 같았어. 큐는 뭘 줘야 할지 몰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어. 옆에 있는 건 테이블보나 후추통이었고 자신이 가진 건 스마트폰과 랩톱, 지갑이 다였어. 이 중에 뭘 달라는 건지 큐는 나름 심각하게 눈치를 봤어. 하지만 당연히 보기만 했지. 큐는 결국 테이블 끝에 있는 칵테일 냅킨을 본드의 손바닥 위에 올렸어.




“아니야.”


“네?”


“손.”


“네?”


“니 손.”


“아..”




본드가 고개를 젓는 것에 놀란 큐가 칵테일 냅킨을 다시 잡았다가, 손이란 소리에 다시 조용히 내렸어. 본드는 큐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잡았어.




“큐.”


“네, 더블오세븐.”


“끝까지 잘 들어.”


“네. 그럴게요.”


“내일 저녁도 같이 하자.”


“점..”


“점심도.”


“좋아요.”


“모래도.”


“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 말이야.”


“계속이요?”


“그래.”


“더블오세븐 일이..”


“네가 밥 먹으러 갈 틈도 없이 바쁘거나 내가 현장에 나간 게 아니라면.. 아니, 네가 나갈 시간이 없으면 내가 사갈 테니 같이 먹어. 점심이나 저녁이나 다.”


“그..”


“싫어?”


“아니요, 전혀 안 싫어요. 좋긴 한데.. 왜요?”


“그러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본드는 더 빨개질 수 없을 때까지 얼굴이 새빨개진 큐를 보며 한숨 쉬었어. 마음 같아서는 점심이고 저녁이고 개뿔이고, 당장 내일 아침으로 침대에서 토스트를 나눠 먹고 싶을 다름인데 참 많이도 참는 중이었어. 이렇게 천천히 다가가는데도 큐의 표정은 대공황이었어. 저러다 과부하라도 걸릴 것 같았지. 본드는 내가 얠 데리고 대체 뭘 하나 싶었어.



안 싫다니까 됐지 뭐. 본드는 이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어. 눈을 깜빡이며 ‘그러게’ 뜻을 생각하고 있는 큐의 어깨를 토닥였어. 수고한다, 좀만 더 해. 하듯 말이야.



















11.

 

 

지금 나가도 될까? 점심시간은 삼십분 남았는데.. 나 규칙 어기는 거지? 근데 지금 가고싶은데.. 점심시간이 되고 나서 가면 늦을거야. 오늘은 내가 점심을 사야한단 말이야. 본드가 샐러드를 사러 나가기 전에 내가 사서 돌아와야 돼. 나가고 나면 늦어. 지금 나가야해. 아, 어떡하지? 본드가 어제 그러게 왜 자신이 늘 사냐고 했잖아. 어떻게 매번 얻어먹으면서 도시락을 본드가 사왔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지? 난 멍청이야. 오죽했음 말까지 했겠어. 그러게라니, 어떡해 난 물색없는 사람이라고 평가받고 있을거야. 본드한테 그런 사람이기 싫어..

 

오늘도 머릿속에 전쟁이 난 큐는 눈치를 보고 있었어. 겉으로 보기엔 시큰둥한 얼굴로 직원들을 감시하듯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지만, 큐브랜치의 형 누나들은 큐의 진심을 눈치 채고 있었어. 점심시간이 멀었는데 일찌감치 챙겨 입은 야상이나 가죽이 구겨져라 들고 있는 지갑, 반 쯤 돌아간 의자를 보면 왜 저러고 있는지 대충 알려줬거든. 신발 앞코가 움찔거리는 걸 보면 발가락도 꼼지락대는 모양이었지. 꽉 다문 입 끝은 마음이 급하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고 눈동자가 굴러다니는 게 확신을 줬어. 이건 뭐 얼굴 빼고 온 몸으로 말하고 있는 샘이었어.

 

 

 

- 배가 많이 고픈가?

 

- 글쎄 갈 곳이 있는 거 아냐? 병원이나 우체국같은?

 

- 그래 먹을 것보단 그게 신빙성 있다

 

- ??

 

- 쿼터마스터는 잘 안 먹잖아

 

- 아냐 마이클 사실 따지고 보면 안 그래 잘 생각해봐 비프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고 일차 디저트로 마카롱 먹고 이차로 스니커즈 먹고 핫초코에 설탕 부워 마시고 과일이나 사탕도 주는대로 받아먹는 사람이잖아

 

- 그런가???

 

- ㅇㅇ;;;; 쿼터마스터의 몸매에 우린 셀프로 속고있어

 

- 하긴.. 그랬지 같이 뭔갈 먹을 땐 꼭 고기였고

 

- ㅇㅇ..

 

- 먹을 걸 줬을 때 거부당한 적도 없었어

 

- 엘랜이 준 워터쿠키 빼고

 

그래 그건 안 먹더라

 

ㅇㅇ... 그런 것만 먹고 살게 생겼는데 말이야

 

- 아 그래도 그게 그립다 챙겨 먹이는 재미가 있었는데 요즘 점심시간 땡하면 사라지니까ㅜ우리 쿼터마스터ㅠㅠㅠ 대체 어디가는 건데ㅠㅠ

 

 

 

형 누나들은 사내 메신저로 큐에 대한 잡담을 주고받았어. 이야기의 대세는 큐가 빨리 나가고 싶어 하는 건 알겠는데 대체 왜 저러고 있냐는 거였어. 목적지는 몰라도 상당히 지금 당장 가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왜 안 가냐고 서로 물었어. 자기가 수장이니 혼낼 사람도 없는데 말이야. 자주도 아니고, 고작 삼십분을 당겨썼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었지.

 

 

 

- 그러고보니 어제도 저러지 않았어?

 

- 어제도 저러고 있다가 십분 일찍 갔지

 

- 조기퇴근해서 미안하다고 온갖 사과를 하고 갔어

 

- 드문 일이긴 하네

 

- 난 뭐 반나절 쯤 일찍 가는 줄 알았어

 

- 어제 오늘 연속이라 더 힘들어하는 것같다

 

- 누가 좀 살려줘라 저러다 울겠다

 

 

 

형 누나들은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았어. 그러다 한명이 결심하듯 일어나서 목을 가다듬었어.

 

 

 

"쿼터마스터, 점심시간이 시작되고 달려가면 해피밀 장난감이 품절일텐데 조금만 일찍 가도 될까요?"

 

 

 

형 누나들은 그 순간 풀어져서 헿헿 웃던 쿼터마스터를 놓치지 않았어. 큐는 저 하찮은 변명에도 오늘만이에요! 하며 활짝 웃었어. 그 웃음이 하도 기다렸다는 듯하고 밝아서 몇몇은 쿼터마스터가 마침 해피밀 장난감을 노리던 게 아니었을까 추리했어. 한명만 특권을 가질 순 없으니까 다 같이 좀 이른 점심시간을 가지자고 한 큐는 잽싸게 일어났어. (물론 큐 치고는 비교적 잽싸게였지) 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자 곳곳에서 피식거리는 웃음이 터졌어.

 

 







 

 

 

*

 

 

 







 

 

구글 지도를 켜고 찾아간 큐는 멕시칸 요리를 샀어. 어제 밤새 '그러게'의 의미를 해석하다가 자신이 너무 얻어먹었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 후부터 맛있는 요리를 폭풍 검색하기 시작했거든. 블로그며 카페 반응을 서치해서 업체 측의 광고 글이거나 협찬을 빼고 나머지 글의 평점을 모아보니 주변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브리또와 타코였어. 큐는 서치 결과대로 꼼꼼하게 음식을 샀어.

 

 

 

물론 큐는 이 모든 행위를 매우 서둘러 해냈지만 당연히 빠르진 않았어. 큐가 자신의 비프브리또와 본드의 치킨브리또, 나눠먹을 소프트 타코와 나초에 음료를 버겁게 들고 현장요원 섹션에 갔을 때 본드는 큐브랜치에 있었어. 그것도 점심시간이면 늘 마주치던 건물 입구에서 십여분을 기다리고 올라온 거였어. 평소랑 다르게 흐트러진 큐의 책상을 보는 본드는 가벼운 멘붕을 맛봤어. 큐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당연히 점심시간이 온지도 모르고 일에 집중해서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자리는 비어 있었고, 큐브랜치 전체도 늦게까지 일 한 흔적 없이 사람이 적었어.

 

 

왜지? 뭐지? 단정하지 않게 쭉 뒤로 빠진 의자와 씻어놓지 않은 큐텐 컵이 심상찮았어. 누가 봐도 급히 나간 티가 났거든. 왜 급하게 나갔을까? 혹시 자신의 예상처럼 점심시간 넘어서까지 일을 하다가 늦어서 그랬나 싶었어. 자신을 만나러 급하게 나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지. 그렇담 길이 엇갈렸나? 그렇다기엔 사실 좀 무리가 있었어. 평소 만나던 시간부터 지금까지 쭉 기다렸다 올라왔으니 그럴리는 없을 것 같았고.. 한참 생각하던 본드는 설마하니 이 서두름이 도망의 흔적인가 싶었어. 이 시간에 도망이라면 이유는 자신밖에 없었지. 큐가 점심시간에 엠이나 직원들을 피해 도망갔을 리는 없잖아. 대체 왜?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본드는 설마하니 어제의 ‘그러게’ 자극이 부담이었나 싶었어. 사실 눈치 없고 발전 없는 큐가 답답해서 해놓긴 했는데 큐에겐 너무 섣불렀나 좀 후회했거든.

 

 

 

“큐가 급하게 나갔나?”

 

 

 

본드는 샌드위치를 뜯어 먹으며 모니터를 보고 있던 큐브랜치 직원에게 물었어. 그는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어.

 

 

 

“네. 엄청.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뛰어갔어요. 아마 해피밀 세트 장난감을 받으러 간 것 같은데요.”

 

 

 

맙소사? 본드는 그 말도 안 되는 말에 한숨을 터트렸어. 아무리 어리다지만 그 나이에 해피밀 세트 장난감 따위를 받으러 급하게 갔다고? 큐에게 자신이 모르던 또 다른 귀여워 죽겠는 면이 있는 거거나 아니면 명백히 자신을 피해 뛰어나간 거겠지, 싶었어. 빠르지도 않은 애가 자신을 피하려고 파닥파닥 뛰어갔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좀 아팠어. 본드는 머리를 흔들며 큐의 의자에 풀썩 앉았어. 해피밀 세트를 사러 갔든 자신을 피해 도망을 갔든 길이 엇갈렸든 어쨌든 여기로 돌아 올 거였으니까.

 

 

그나저나 이 음료는 대체 뭐야? 본드는 큐가 남겨놓은 큐텐 컵을 살폈어. 외관을 살펴보고 냄새를 맡아봤는데 전에 큐가 자신의 사무실에 누워있는 걸 발견했을 때 마셨던 음료와 동일한 것 같았어. 초콜렛 향이 나긴 하는데 탄내와 섞인 쓴냄새가 같이 나는 이게 대체 뭘까. 내부에는 묘한 가루 덩어리도 남아있었어. 본드는 한 때 독극물이라고 우스갯소리로 생각했던 이 이상한 음료를 즐겨 마시는 큐의 취향을 이해 할 수 없었어. 흘러내린 부분을 혀로 슬쩍 핥아봤는데 예상대로 달고 쓰고 탄내가 났어. 이런 맛을 좋아한단 말이야? 이걸 왜 마시는 거야? 이게 대체 뭐지? 큐를 기다리며 할 일이 없는 본드는 컵을 노려보며 쓸 때 없는 추리를 시작했어.

 

 

 





 

 

반면 큐는 본드를 자주 발견했던 곳을 쏘다녔어. 트레이닝실과 흡연실, 휴게실 등을 돌아다녔는데 본드는 보이지 않았어. 시간을 확인하고 설마 싶어서 그 음식들을 다 들고 MI6 건물 입구, 늘 밥을 먹던 공원에도 가 봤어. 큐는 녹아가는 탄산음료의 얼음을 보며 입을 댓발 내밀었어. 자신이 알기엔 본드가 오늘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울 일이란 없었거든. 물론 자유로운 영혼이라 일이 없는 날이면 뜬금없는 곳에 가있기도 했지만 자신과 점심을 먹기 시작하고서는 그런 일이 없었어. 건물로 돌아온 큐는 다시 현장요원 섹션을 한 바퀴 돌았어. 여전히 본드는 없었어. 큐는 슬슬 꼬르륵 소리가 나는 자신의 배와 손에 들린 음식을 한참 내려 보다가 트레이닝실 밖의 벽에 등을 기대고 멍청하게 섰어.

 

 

저녁을 먹자고 한 게 점심은 아니라는 소리였나 생각을 하긴 했는데 점심도 같이 먹자고 다시 말 했었잖아. 큐는 자신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어서 본드가 늦나보다 생각했어. 그리고 길이 엇갈리지 않도록 늘 만나던 건물 입구로 가 서있었어. 어차피 입구라 돌아올 때 꼭 지나칠 테니까. 녹아가는 얼음과 탄산이 안타까웠어.

 

 







 

 

 

*

 

 






 

 

 

큐는 슬슬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직원들에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어. 그들은 큐의 손에 들린 음식들을 보며 궁금한 듯 걸음을 한 번 씩 멈췄어. 큐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퇴근 전까지 제게 주셔야 할 게 있을 텐데요, 하고 말문을 막았어. 큐의 마른 손바닥에는 음식 봉투가 남긴 빨간 자국이 남아있었고 워낙 주먹 쥐고 있느라 솟은 땀으로 젖어 있었어. 그리고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지. 얼굴은 늘 그렇듯 담담했지만 어쩐지 조금 붉었어. 특히 눈가가 그랬지.

 

 

점심시간이 끝나기 직전까지 그대로 서있던 큐는 느리게 걸어서 엘리베이터를 탔어. 이미 몇 차례 전쟁이 끝나고 이젠 휴전중인 머리에서 다시 한바탕 전쟁이 일어날 듯 잡생각이 울렁거렸어. 머릿속 전쟁이 한 차례 끝날 때마다 큐의 어깨는 조금씩 더 쳐지고 움직임은 더 더뎌지는 중이었어.

 

 

다행히 점심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큐브랜치로 올라온 큐는 입술을 모아서 깨물고 있었어. 눈가는 더 할 수 없이 붉었지. 이유는 하도 많아서 딱히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웠어. 본드와 점심시간을 보내지 못 했다는 단순한 서운함과 가지가지 오해들이 듬뿍 섞여 있었거든.

 

 

 

본드는 시간에 칼 같은 큐가 점심시간이 끝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걸 보고 자신을 피하고 있다고 확신했어. 이 느린 속도도 벅차다니 앞길이 막막하기 그지없었어. 차라리 이럴 거 직구를 던져볼까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러다 그 직구에 맞은 큐가 그대로 날아가 버릴까봐 금방 생각을 접었어. 본드는 손목시계가 점심시간 끝을 오롯이 가리키는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는데,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어.

 

 

그 안에는 (아마도) 울먹울먹한 큐가 서 있었어.

 

 

 

본드는 재빠르게 큐의 행색을 살폈어. 하도 들고 있어서 피가 몰린 빨간 손과 (아마도) 울먹한 얼굴, 음식봉투..

 

 

 

“너..”

 

 

 

큐는 당황했는지 눈을 여러 번 깜빡였어.

 

 

 

“나 저기서 너 기다렸어.”

 

 

 

본드는 큐가 다른 생각을 하기 전에 다짜고짜 변명부터 했어. 나도 너 기다렸다? 하고 말이야.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마친 본드가 꼼짝 없이 서 있는 큐의 어깨를 꽉 잡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어. 반면에 큐는 상황판단이 안 돼서 여전히 눈을 깜빡이고만 있었어. 큐를 잡은 채로 닫힘 버튼을 누른 본드가 큐의 빨개진 손이 안타까워서 봉투부터 뺏어들었어. 멍한 큐는 본드가 어쩌는지도 모르고 넘겨줬어. 본드를 기다리며 머릿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전쟁이 한 번에 다시 터지는 기분이었어. 다시 빨개지기 시작하는 큐의 눈가를 보던 본드는 참지 못 하고 큐를 꽉 끌어안았어. 왠지 귀여워서 안아주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거든. 좀 미안하고 좀 대견하기도 하고 좀 바보같기도 하고 여러 마음이 함께였지만 귀엽다는 감정이 제일 컸어.

 

 

본드 품에 안긴 큐는 품에 안겼다는 걸 인식하기 전에 코가 찡찡해져서 어깨에 코를 꾹 누르며 안겨 들었어.

 

 

 

물론 엘리베이터가 일층에 도착하고 나서야 자신이 본드에게 안겼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몸이 뻗뻗뻗뻗뻗뻗하게 굳어버렸지.

 

 

 

 

 

 

 

 

 

 

 



 

 

둘은 늘 가던 공원에 가서 샐러드 두 팩과 탄산이 사라진 밍밍한 탄산음료, 멕시코 음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어. 본드는 탄산은 별로인데 잘 됐다며 웃었고 배에서 소리가 나는 지경이었던 큐는 본드가 치킨 브리또를 먹는 동안 비프 브리또와 나눠 먹으려고 샀던 타코까지 혼자 먹어 치웠어. 본드는 큐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웃었고 큐의 웅크린 다리를 자신의 다리로 장난스럽게 툭툭 찼어. 큐는 더 웅크리며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본드를 쳐다봤어. 자신의 삽질을 깨달고 얼굴이 시뻘개져 있긴 했지만.

 

 

 

“큐.”

 

“네, 더블오세븐.”

 

“제임스라고 불러보는 건 어때.”

 

“네?”

 

“그럴만한 사이 아닌가?”

 

“그.. 누구.. 네? 그, 저, 네?!”

 

“우리말이야.”

 

 

 

본드가 스윗하게 웃었어. 큐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터질 듯 빨개졌어.

 

 

 

“저녁은 뭘 먹을까?”

 

 

 

본드의 말이 자신이 이해한 말이 맞는지, 모자란 연애지식으로 빡시게 생각하던 큐가 조심스럽게 본드와 눈을 마주쳤어. 본드는 여유롭게 웃으며 다시 발로 큐의 발을 건들며 장난을 걸었어. 큐는 본드의 발을 빤히 내려 보다가 웅크리고 있던 발로 응답하듯 본드의 발을 톡 쳤어. 그리고 작은 소리로 고기.. 하고 웅얼거렸어.

 

 

 

 

 

 

 





 





 

 

 

그리고 그날, 돌아간 큐의 책상에는 수많은 해피밀 인형이 놓여 있었어. 큐는 대체 이게 뭔지 몰라서 의미를 생각하며 뚱한 표정으로 만지작거렸는데, 큐브랜치 사내 메신저는 뿌듯함의 이모티콘이 쉴 새 없이 오고갔어.

 

 

이번엔 진짜 뚱한 거였지만 뭐.. 큐브랜치 형 누나들은 오해 덕에 즐거웠어.







2014.06.15 (21:41:41)
dcb54
모바일
선서선선섯새이뮤ㅠㅜㅜㅜㅜㅜㅜㅜㅜㅜ점핑큰절 ㅠㅠㅠㅠㅠㅠ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선생님 큐가 넘 좋아 미칠것가타요 ㅠㅠㅠㅠㅜㅜㅠ
[Code: ddd8]
2014.06.15 (21:42:26)
03739
모바일
으규으규 망충한 큐샤기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제발 어나더가 있다고 말해줘여 센세 ㅠㅠㅠㅠㅠㅠㅠ
[Code: ddd8]
2014.06.15 (21:56:33)
2c72d
모바일
아 선생님 제발 헐 아 긷다렸잖아요유ㅠㅠㅠㅠㅠ맨날 긷다렸는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세ㅓ선샡밈ㅠㅠㅠㅠㅠ
[Code: 102e]
2014.06.15 (23:17:19)
bb688
읽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큐 ㅠㅠㅠㅠㅠㅠㅠ 졸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af35]
2014.06.16 (18:00:39)
2960c
선생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나더요ㅠㅠㅠㅠㅠㅠ 완결이라고 한 적 없자나요 그러쵸?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6b17]
2014.06.16 (22:27:47)
1a720
아 선생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진짜 최고ㅠㅠㅠㅠㅠㅠ 처음에는 짠내에 오해받는 큐가 안타까웠는데 점점 달달해지고ㅠㅠㅠㅠ 으아아아가규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fa16]
2014.06.17 (00:44:02)
366d8
선생님 선생님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처음엔 짠내폭발이라 큐가 너무 가엾었는데 뒤로 갈수록 점점 따뜻달달달달달달다구리 훈훈해져서 ㅜㅜㅜㅜㅜㅜㅜㅜ으아아아 큐도 너무 귀엽고 그런 큐에게 반해가는 본드도 너무 따뜻해서 좋아요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외로웠구ㅏㄴ 본드ㅜㅜㅜㅜㅜㅜ 이제 가까워질 만큼 가까우졌으니 뒤에 대하드라마가 펼쳐진다고 믿겠습니다 ㅜㅜㅜㅜㅜㅜㅜ
[Code: 3135]
2014.06.17 (13:24:39)
1b993
모바일
큐의 뒤통수와 웅크린 몸을 생각하며 가슴팍을 퍽퍽 쳐댔어. 세상에 계란 노른자를 좋아하다니 딱 좋다 생각하면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시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더블오세븐 졸귀해요
[Code: 37ea]
2014.06.17 (22:45:46)
72d28
휘갤에서 보니까 다시 봐도 더 좋 더 잼 꿀잼 완전 잼잼잼잼잼!!!!
선생님 코맙~!!!!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으아아아 달달해지는거 너무 좋아 ㅠㅠㅠㅠ
1편이나 2편까지만 해도 얘네 어느 세월에 오해를 푸나 했는데 한 번 흐름 타니까 너무 좋아요 ㅠㅠㅠㅠㅠㅠㅠ
귀요미 큐 ㅋㅋㅋㅋㅋ
[Code: add3]
2014.10.11 (14:30:45)
765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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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진짜...ㅜㅜㅜㅜㅜ아광대...내광대.....하...행복해ㅠㅠㅠㅠ내가이런대작을볼수있었다니센세 오늘저의하루는핑크빛일거예요..하..이게끝은아니겠죠ㅠㅠ더있겠죠 죽어도 더보고깊어ㅠㅠㅠ아너무사랑스러워ㅠㅠ아냐죽으먄못보니까ㅠㅠㅠ아니...ㅠㅠㅠ어나더..어나더를달라ㅜㅜㅜ센세
[Code: 108c]
2014.11.21 (02:05:10)
334c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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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어나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으아아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ㅜㅜㅠ아 너무 좋아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ㅜㅠ
[Code: d9a1]
2015.02.18 (12:12:21)
2644a
으아 쫀쫗쫗쫂쫀 아 진ㅉ ㅏ몇번을봐도 꿀잼

센세내꺼!!
[Code: 0674]
2015.03.15 (03:52:01)
29a72
모바일
존잼꿀잼ㅠㅠㅜㅠㅠㅠㅠㅠㅠ사랑해요 센세ㅠㅠㅜㅜㅜㅠㅠㅠㅠ
[Code: ed24]
2015.11.02 (00:42:55)
6dc13
모바일
이런 레어템 큐를 본드 혼자 소장하다닛! 싫어! 나도 갖고 싶엇! 안되면 큐브런치에 취직이라도 시켜주던가!
[Code: e98b]
Notice 휘갤 사이트 이전 알림 [20] 01-02 17497 49
19363 ■ BWDB: 벤 휘쇼 데이터베이스 (Filmography of Ben Whishaw) ■ [17] 05-13 7221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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